2a 나의 산문

박설호: (1) 한국 사회와 성

필자 (匹子) 2025. 8. 17. 10:58

 

“여성의 뇌는 남자의 그것보다 가볍다. 그러나 여성의 신경 전달물질의 속도는 남자보다 빠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예속」에서)

 

1. 들어가는 말씀: 남한 사회의 부패지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높습니다. 권력자에게 보내는 사과 상자 속에는 수억의 돈이 들어 있습니다. 정경유착으로 인한 비리를 열거하려면 아마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은 인정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정은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부패의 관행을 낳기도 합니다. 선한 의도에서 베푸는 돈과 선물은 생각에 따라서는 금품수수로 곡해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가족 이기주의의 세계관은 삶의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우리는 우선 기부의 관습을 정착시키고, 사회보장 제도를 확대해 나가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됩니다. 미리 한 가지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디 성의 문제를 지엽적인 담론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소하고 하찮은 갈등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다반사가 아닙니까?

 

2. 성에 대항하는 윤리: 성에 관한 논의를 “칙칙하다.”고 여기며,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시행된 금욕 교육 내지는 도덕적 강령과 종교적 윤리 등의 영향은 엄청난 것이지요. 그렇기에 누군가 성의 해방을 부르짖을 때, 사람들은 당사자에게 이중적으로 비판을 가합니다. 그 하나는 성의 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적 방종을 불러일으킨다고 비난하는 경향이요, 다른 하나는 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당사자에게 방종하고 부도덕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경향입니다.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은 주어진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성의 해방을 윤리에 어긋난다고 규정합니다. 특히 상처 입은 자신의 삶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근엄한 자세를 취하는 그들은 근본적으로 열악한 삶의 조건에 희생당한 피해자일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강제적 성 윤리를 조금만 수정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것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켜야 할까요?

 

3. 내로남불: 우리는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남에게는 엄격하게 대합니다. 모든 인간 동물은 성에 관해서는 철저히 이기적인 태도를 취하지요. 가령 우리는 거지가 굶주리고 있을 때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행여나 나도 언젠가는 거지가 될지 모른다고 여기며 동전을 던져주지요 그러나 성에 굶주린 사람을 대할 때 이와 같은 동정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적으로 불행하게 살아가는 영혼들의 고통을 외면합니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 오히려 쾌재를 부르는 까닭은 사랑과 성에 관한 한 이기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남들보다도 더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예컨대 주위에서 잘나가는 행복한 연인에 대해 우리는 선망의 눈초리를 지니고, 때로는 질투심을 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놀라운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사랑과 성에 대한 이기적 마음가짐은 어처구니없게도 성에 대한 견해를 무의식적으로 더욱 엄격하게 품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동성연애를 즐기는 부치와 팸, 가죽 족, 트랜스젠더 등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자신과 다른 외계인들이라고 매도합니다. 과거에 동성동본 혼인 금지 조항으로 괴로워하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지금도 일본, 독일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친남매는 결혼할 수 없으나, 사촌끼리 결혼할 수 있습니다. 동성연애자들을 논외로 하더라도 일부일처제의 틀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4. 하나의 비유. 성과 사랑, 성과 권력 그리고 성과 혁명 등이 서로 얽힌 채 묘사되어 있는 작품은 그야말로 탁월합니다. 연애를 위한 연애 소설이 통속성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성의 문제가 얼마나 인간 삶의 제반 조건들과 결착되어 있는가?’하는 물음에 정확히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의 작가, 알베르또 모라비아의 󰡔권태La Noia󰡕 (1960)는 그야말로 권태를 불러일으킵니다. 모라비아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말을 독자에게 전하려고 한 게 분명합니다. 즉 성적 만족은 지루한 삶의 포만감을 낳고 성적 불만은 내면적 고통 뿐 아니라, 공격 성향을 잉태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리비도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마치 유약한 고무풍선과 같아서 조그만 바늘의 자극에도 펑 터져버립니다. 성생활의 불만족은 다른 곳에서 공격 성향으로 표출됩니다. 실러의 󰡔간계와 사랑󰡕이 탁월한 고전으로 인정받는 것은 사랑과 권력의 문제를 한꺼번에 다루었다는 데에 기인합니다. 한마디로 성에 관한 담론이 성생활의 문제에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5. 배비장의 문화: 판소리 『배비장전』은 단순히 양반의 위선에 대한 패러디로 해석될 수만은 없습니다. 그것은 조선인들의 표리부동한 행동을 야유하는 작품입니다. 배비장은 제주도에서 몰래 애랑이라는 이름의 기녀와 애정 행각을 벌입니다. 그러다가 자칭 도덕군자인 그는 “개망신”을 당합니다. 한마디로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을 은폐시키다가, 나중에 심하게 피해당하는 배비장은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과도 같습니다. 프로이센의 속담에 “더러운 빨래는 몰래 빨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은 시민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령 한국 사람들은 너무 남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체면과 위신, 명분과 허영심이 배비장이 지닌 전형적 덕목입니다. 남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돈이 없어도 외제차를 끌고 다니고,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리며, 혹시 남들이 행여나 딸의 이혼 소식을 접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기성세대의 남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명분과 체면이 중시되는 세상. 그렇기에 겉으로 화려한 한국인들의 명분보다는 속으로 모든 이익을 챙기는 일본인들의 실리가 오히려 돋보일 때가 있습니다. 타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소신껏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살바토르 비니에그라 (Salvator Viniegra, 1862 - 1915)의 그림 "아담과 이브의 첫 키스"

 

6. 세대 차이: 한국 사회는 아직도 정치적으로는 유교주의로, 경제적으로는 독점 자본주의로, 사회적으로는 가부장적 금욕주의로, 문화적으로는 씨족 이기주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족 도당이라는 단어는 (가족 중심의 끈끈한 혈연관계는) 진리의 쓴맛을 지니고 있다.”는 오스트리아 작가,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의 냉소적인 발언을 생각해 보세요. 한국 사회에서 모든 분야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기성세대 남자들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사고가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견해를 다음 세대에 그대로 대입시키고 답습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이에 비하면 젊은 세대들은 주어진 관습, 도덕 등으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마치 시지포스처럼 시키는 대로 암석을 계속 굴리느니, 주어진 체제를 외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젊은 세대들이 주어진 체제 내에서만 자유를 구가하면, 그들은 다치지 않습니다. 하나 만일 근본적 모순을 비판하고 칼자루 쥔 자들에게 대항한다면, 젊은 시지포스의 발목에는 한국 사회의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이라는 족쇄가 채워질 것입니다.

 

7. 포스트모더니즘: 현대 남한 사회에는 황금만능주의에다 포스트모던의 상품 미학이 덧칠된 채 승리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젊은 남녀들은 새로운 것만을 좋아합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비디오를 즐기는 그들의 감각은 내면보다는 표피를 중시하지요. 그렇기에 오래된 좋은 것은 쉽사리 그들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어디 물건만 그럴까요? 사람도 이에 해당합니다. 늙은이, 결혼한 여자 등은 이른바 구닥다리로 취급당하지요. 얼굴의 주름살보다는 머릿속의 판단력과 따뜻한 가슴이 더 중요한데도, 이는 무시됩니다. 특히 이혼한 여자, 명예퇴직한 가장은 마치 하루아침에 가치 하락한 증권 조각처럼 외면당합니다.

 

허나 껍질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생각해 보세요. 비록 흙이 묻어 있더라도, 보석은 보석입니다. 비록 낡았더라도 훌륭한 오디오 세트는 아무렇게나 만들어낸 싸구려 신제품보다는 수명이 오래 갑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빛 좋은 개살구보다는 흙 묻은 다이아몬드를 선호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한국 사회만큼 인간을, 특히 인간을 물화(物化)하는 나라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껍질 문화, 상품 미학 때문이지요.

 

8. 실수는 인간적이다. 어쩌면 완벽 추구를 삶의 제일가는 과제로 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하자가 도사릴지 모릅니다. 그들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줄 모릅니다. 도덕군자들은 성에 대해 근엄한 자세를 취하며, 내심 타인의 행복에 질투심을 품지요. 이에 비하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술집 여자들은 대체로 인간의 결함에 대해 아량을 베풀 줄 압니다. 물론 이들이 무조건 훌륭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실수가 인간적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작은 잘못만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대부분 순간적으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가요? 샨도르 페렌치Sandor Ferenczi가 주장하듯이, 어쩌면 근엄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피해자들입니다. 왜냐면 부모는 자신의 불만족을 아이들이 대신 충족시켜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시켜서 학과를 선택하고, 부모가 시켜서 누군가와 결혼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이 경우 아이들은 부모들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키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나, 우리는 더이상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해 관용의 정신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