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9. 슈테펜 멘싱의 「횔덜린」
“어둠의 나라가 거대한 폭력으로 도래한다면, 우리는 책상 앞의 펜을 집어 던지고, 신의 이름으로 우리는 거대한 고난의 장소로 향해야 하리라. 그곳은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할 테니까.” (프리드리히 횔덜린)
50년 이후에 태어난 구동독의 시인들도 횔덜린을 소재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각주: 이를테면 노어베르트 아이졸트 Norbert Eisold의 「그리고 자유를 이해하라」, 롤란트 에르프 Roland Erb의 「횔덜린에게」, 얀 플리거 Jan Flieger의 「횔덜린」, 요르크 코발스키 Jork Kowalski의 「횔덜린, 보르도에서 돌아오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횔덜린의 혁명적 이상을 부각시키거나, 사회 변화와 관련된 긍정적인 의식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80년대 동독에서 발표된 문학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이들은 “허황된”, 혹은 당국에 의해서 조작된 유토피아의 정신을 부정하고, 개인적 자아를 추적하였다. 70년대 동독 문학의 주제가 대체로 “희망에 대한 병적 집착” (Manfred Jäger)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면, 80년대의 그것은 “사고의 무정부주의”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주위에는 정신적 지주로 삼을만한 기성 문인들이 없었다. 그들이 언어의 문제를 주로 다룬 까닭은 이념 뿐 아니라, ‘낱말 역시 주어진 상황에서는 고유의 역할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라는 절망적 회의주의에 기인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슈테펜 멘싱 (1958 - )의 「횔덜린」은 무척 특이한 작품이다.
1 “하하! 누구도 깃발만으로는 우리
2 미래의 민족을 식별하지 못할 것이네;
3 모든 게 젊어져야 하고, 근본적으로
4 달라져야 하네; 진지함에 가득 찬
5 욕구를, 모두 즐겁게 일을!
6 목재와 천 그리고 리본들.
7 나는 나무를, 깃발을 들고
8 들끓는 스타디움으로 향한다.
9 가요, 간다니까요,
10 운동장 한복판에서
11 나는 구멍을 판다,
12 여기서 우리는 춤추려 한다.
13 모난 하늘은 각을 지우고
14 다시 부드럽게 변한다.
15 관람석이 바람에 삐걱거리며,
16 골인!, 하고 외친다 골인!
17 흙덩이가 내 발에 들어붙는다,
18 허나 나는 바보가 아니야!
19 관람석과 깃발이 무엇을
20 쏘아대는가? 돌격대의
21 군기를 차라리 꺾어버려라.
22 골인! 깃발이 펄럭인다 골인!
23 탈영병, 나 혼자 어떤 다른
24 깃발 쪽으로 도망치고 있네.
25 어떤 전혀 다른 천,
26 스스로 불타고 말 깃발.
27 다시, 계속, 반복해서.
28 푸른 잔디위에 피가 고인
29 웅덩이를 보고, 비웃으며,
30 바보들 나는 외친다 바보들!
31 나무를 똑바로 세워라!
32 나는 나 자신을 처형한다.
33 나의 뇌피 속에는 열심히 교정한,
34 인쇄용 깃발이 감추어져 있다.
35 나의 깃발에 아직 버티고 있어,
36 만약 내가 시간의 둔탁한
37 칼 속에서 웃으면서 고꾸라진다면,
38 친구야, 밖으로 나와!” (각주: 붉은 색으로 표기된 것은 원문에서는 고딕체로 기술되어 있다. Steffen Mensching: Hölderlin, in: Neuere Deutsche Literatur, 29/ 1981, Nr. 3, S. 120f.).
시의 내용은 제목 ‘횔덜린’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어떠한 이유에서 시어들이 어색하게 상호 충돌하는가? 이 시의 배경은 ‘언제’ ‘어디’인가? 여러 가지 분열된 현실상이 시공을 초월하여 교차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경기장 모임 ⇒ 축구 시합 ⇒ 전장터 ⇒ 투우장 ⇒ 처형장 등).
1 - 5: 시답지 않게 처음부터 하나의 슬로건이 등장하고 있다. 1행에서 깃발이 국기를 지칭하는 것은 명백하다. ‘나’의 생각에 의하면 깃발은 민족을 수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국가 체제 (깃발)의 견해는 민족 모두의 (혹은 다수의) 의견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동독의 현실에 주어진 사항들을 조금씩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되며, 모든 게 근본적으로 뒤바뀌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진지함에 가득 찬 (...) 일을!”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 아이러니이다.
6 - 12: 목재와 천 그리고 리본은 깃발의 부속물이다. 그럼에도 ‘나’는 깃발이 아니라, 나무 한그루를 들고 스타디움으로 간다. 깃발을 흔드는 마스게임에 참석하고 있는 ‘나’는 다른 사람처럼 깃발을 흔들고 싶지 않고, “나무”를 심고 싶을 뿐이다. 마치 프랑스 혁명을 접한 횔덜린이 18세기 말경에 친구 헤겔과 셰링 등과 함께 자유의 나무를 심었듯이, ‘나’ 역시 한그루의 나무를 심고 싶다. 9행의 “가요, 간다니까요” 라는 표현은 ‘내’가 집회에 “억지로” 참석했음을 암시한다. 다른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고 있는 동안, ‘나’는 차라리 나무를 심기 위한 구멍을 파고 싶다. 여기서 자아는 -마치 횔덜린이 튀빙겐의 어느 탑 속에서 고립되었듯이- 외부 세계와 이중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첫째로 자아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대중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둘째로 ‘나’를 포함한 모든 대중들은 행사의 주최자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
13 - 22: “모난 하늘이 각을 지우고/ 다시 부드럽게 변한다.”는 구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 (각주: 파칼렌은 이를 “자아의 현실 감각 및 시간 감각”이 교차되고 있음을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S. Pakalén, a. a. O., S. 227.). 15행은 횔덜린의 시 「삶의 절반」의 부분적 인용인데, 풍향기에 삐걱거리는 것은 깃발이 아니라, “높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관람석”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권력층에 대한 은밀한 야유를 읽을 수 있다. 16행에서 정치적 모임은 시인의 자의식속에서 축구 시합으로, 그리고 20행에서 전쟁에 참여한 돌격대의 전투로써 반전 (反轉)된다. 사람들의 아우성은 “골인 (Tor)”하고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주위 군인들이 깃발을 들고 맹렬히 적을 물리치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명령에 복종할 정도로 “바보 (Tor)”가 아니라는 것이다. (각주: 독일어 단어인 ‘Tor’란 때로는 ‘바보’라는 의미로, 때로는 ‘문 (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멘싱은 언어의 유희를 이용하여, 정책에 맹종하는 대중들의 열광을 기막히게 풍자하고 있다.).
23 - 31: 강요된 싸움에 나서고 싶지 않은 ‘나’는 마치 “탈영병”처럼 대열에서 빠지고 싶다. 이때 다시 떠오르는 장면은 “스스로 불타고 말”, 붉은 깃발이다. 다시금 ‘나’의 의식은 스페인의 투우장에서 펄럭이는 붉은 천으로 향하고 있다. 강자 (마타도어)는 약자 (투우)를 죽이고 피를 흘리게 하는 행위는 비단 투우장에서 뿐일까? 역사 속에서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다시, 계속, 반복해서” 자행되고 있지 않는가? 그러기에 ‘나’는 어리석은 자들을 비웃으며, “나무를 똑바로 세워라”고 외치고 싶을 뿐이다. 여기서 “나무”란 두말할 나위 없이 (프랑스 혁명 후의 시기에서 사용되었던) 단두대 (斷頭臺)를 건설하기 위한 목재를 지칭한다.
32 - 38: 그러나 처형되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강자들이 아니라, 힘없는 국외자들이었다. 32행에서 ‘나’는 (마치 횔덜린이 과거에 그렇게 상상했듯이) 스스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고 상상한다. ‘나’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하나의 공화주의를 위한, “교정된” 깃발을 갈구한다. 이 깃발은 문학 작품 속에 교묘히 은폐되어 (“인쇄용”) 나타나지만, 언제나 머리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35행에서 시인의 뇌리에는 무거운 십자가를 형장으로 끌고 가는 예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의 깃발은” 예수의 십자가처럼 무겁기 때문에 ‘나’는 이를 겨우 견뎌낼 정도라는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행에서 횔덜린의 시 「시골길 산책 Der Gang aufs Land」을 인용하며, 친구들에게 “밖으로 나와”라고 권고하고 있다. (각주: 횔덜린: 빵과 포도주, 박설호 역, 민음사 1997, 54쪽 - 59쪽.). 이는 (9행에서 나타나는) 강요에 의한 참여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말하자면 “해방 Exodus”의 권고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권고는 주어진 모든 것을 거부하는 사고요, 동시에 저항을 위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주어진 현실에서 형장의 이슬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한 거부와 저항은 결코 파기될 수 없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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