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a 나의 산문

십년의 유럽 생활 (1)

필자 (匹子) 2025. 2. 1. 06:23

 

- “망명은 생존을 어렵게 한다. 이별은 죽음의 순간처럼 나타나지만, 우리에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에너지를 부여한다.” (안네 루이제 스타엘 Anne Louise Germaine de Staël )

- "우리 기독교인은 모두가 망명 중인 왕이다." (체스터턴 Gilbert Keith Chesterton)

 

 

태종대 앞바다의 자갈 마당. 청년 시절에 즐겨 찾던 곳.

 

당신은 나의 유학 생활에 관해서 문의하였습니다. 과거사 이야기를 하려니, 쑥스럽고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지나간 삶에서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당신이 문의하니, 솔직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필자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른 나는 부산에 있는 부산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하였습니다.

부산대학교의 모습. 뒤에는 금정산의 자락이 보인다.

 

대학교의 은사들에게서는 -외람된 이야기지만- 배울 게 별로 없었습니다. 특히 외국어 영역에서 많이 뒤졌습니다. 외국어를 듣고 이해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그럴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학과에는 보카타 수녀님 Schwester Vokata이 계셨습니다. 과묵한 수녀님은 어학 교육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한국에 체류한 외국인을 돕는 일에 종사하셨습니다. 원래 말 많은 수다쟁이가 어학 선생으로서 적격입니다. 나의 주위에는 좋은 어학 선생님이 없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인터넷이 발달하여서 얼마든지 독일과 프랑스의 뉴스를 직접 들을 수 있지만, 197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서울에 있는 독일 문화원에서 공부할 때 다른 학생들을 쉽사리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부대 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나는 윗줄 맨 오른쪽에 서 있다. 최춘식 교수 (불문학), 민병욱 교수 (국문학), 류종렬 교수 (국문학), 이정주 시인 (약학) 등이 보인다

 

나는 독문학사 시간에 강의를 빼먹고 도서관에서 독문학사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나와 친구를 불렀습니다. "자네들이 학생이야? 왜 결석을 자주 해?" 나는 차마 "교수님 강의가 좋지 않아서 그 시간에 도서관에서 독문학사 공부를 했습니다."하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교수님이었지만, 강의 중에 책만 읽는 모습이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원래 시인이나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대학 신문에 글을 써서 원고료를 타곤 하였습니다. 학교 다닐 때 유학을 꿈꾼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면 가난한 집안의 둘째로서 부모님에게 부담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문우들은 혜성과 같이 등단했지만, 유독 나만은 신춘문예에서 언제나 낙방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1년 방위병으로 복무한 다음에 부산 동고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부산 동고등학교에서 독일어 선생으로 일했는데, 이때 가르친 제자들은 요즈음도 연락이 오곤 합니다. 이를테면 의사 신금봉, 국회의원이자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한 김영춘, 국회의원 박수영, 변호사 고(故) 이흥락, 용산 참사와 관계된 정병두, 박근혜 정부로부터 핍박당하여 연세대 교수직을 잃게 된 심리학자 황상민, 강남 세브란스 병원 암병동 대표 장항석 교수, 국민 가수이자 배우인 이상우, 문학평론가이자 강 출판사 사장, 정홍수 등은 나의 제자입니다. 그밖에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들보다 더 참답게 사는 제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그리워하고 애호합니다.

 

 

우연히 독일 문화원에서 독일어 교사 연수 참가자를 뽑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에도 독일 문화원은 남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첫해에 낙방한 다음에 이듬해에 꼴찌 장학생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의사소통이 힘들었습니다. 외국어에 통달하려면 24시간 특정 외국인과 함께 생활하는 게 첩경이라고 합니다. 그가 잘못 표현한 말을 수정해주면, 많은 도움을 받게 되지요. 나에게는 이러한 행운이 없었습니다. 시험에 합격한 것도 나로서는 감지덕지할 뿐이었습니다. 정혜영 선생님의 가르침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김광규 선생님은 부산에 계실 때 유학 생활에 관해 많은 조언을 해주셨으며, 고맙게도 추천서까지 써주었습니다. 살아있는 독일어를 배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당시에 절감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