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김광규의 시, '생각과 사이'

필자 (匹子) 2025. 10. 27. 07:55

생각과 사이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

 

독후감:

 

서울 경기 지역에는 수천만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수도권의 15층 아파트 건물이 즐비하다. 여름날 밤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도둑이야!" 하고 외쳤다. 그러나 주민들 가운데 내려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잠옷 차림으로 창문밖을 내다보았을 뿐이다. 며칠 후 바로 그 아파트에 불이 났다. 누군가 1층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면서 "불이야!" 하고  외쳤다. 많은 거주민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모두가 화재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절도 사건 그리고 화재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이째서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게 다를까? 누군가 재산을 강탈당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사건이다. 이에 비하면 아파트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면, 그것은 주민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건이다. 화재는 특정 개인에게 파국을 안겨주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직결된다. 

 

오늘날 시문학의 영역이 삶의 자그마한 부분으로 취급되고 축소화되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시의 영역 그리고 문학 예술의 영역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생각의 사이"를 전해주게 한다. 왜냐면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가상적 현실을 통해서 "도둑이야!"를 외치는 게 아니라, "불이야!"하고 소리치기 때문이다. 문학 속의 현실은 우리 각자의 삶과 직결된다. 그렇다면 문학 예술은 생각의 사이를 작은 범위에서 전해줄 수 있는 수단이 아닌가?

 

김광규 시인은 시인을 정치가, 경제인, 근로자, 법관, 군인, 기사, 농민, 관리, 학자들과 같은 공간에 배열하고 있다. 과연 시인이 이들과 동일한 공간에 배석할 수 있을까? 왜냐면 시인은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를 써서 생활비를 버는 분은 극소수가 아닌가?  

 

각설, 시인은 다가올 비극을 진솔하게 감지하여 이를 전해주는 예언녀, 카산드라와 같다. 왜냐면 그는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깊이 숙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시인들을 양치기 소년이라고 판단하고 등을 돌린다.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