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3.
“햄릿”이라는 인물은 지금까지 유럽에서 지식인의 우유부단 성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는 현실과 자신의 사고 사이의 불협화음을 견디지 못하고 냉소주의자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물론 뮐러 역시 이 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각주: 뮐러는 “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썼다, 비극/ 자신의 지식을 팽개친 한 남자의 이야기/ 어리석은 관습에 자신을 굴복시키며/ 그는 어리석음을 근절하지 못했다.” H. Müller: Geschichten aus der Produktion, Frankfurt a. M. 1984, S. 81f.). 때로는 햄릿은 낡은 지식과 새로운 지식의 인식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 디오니스트라고 평가되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자신의 사고나 의지를 행동으로 관철시키지 못하거나, 머뭇거리다가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인물이다. 뮐러는 이러한 햄릿 상을 작품 속에서 여러 각도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뮐러는 ‘역사란 더럽고 끔찍한 생식, 그러니까 불순한 남녀의 결합이다’라고 파악한다. 인간의 이상이 깨끗하고 순결한 것이라면 현실은 때묻은 것이며, 햄릿은 이러한 차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혁명이란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의 성공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좁히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각주:혁명의 문제는 정치와 경제적인 차원에서 설명될 게 아니라, 인간 심리적 성적인 차원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어쩌면 이 두 가지의 혁명적 동인(動因)은 서로 뒤엉켜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작품 “햄릿 기계”에서 개혁되어야만 하는 현실적 모순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권좌에 오른 뒤에 자기의 어머니를 차지하는 클로디우스에 대한 비밀로서 상징화되고 있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햄릿”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와는 달리- 결국 온존하고 있는 사악한 권력에 결탁해버리고 다만 하나의 기계로서 이용당하고 만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전체주의적인 사회에서 국가는 한 지식인을 억압하고, 일반 대중은 그를 외면해버리기 일쑤이다. 그렇기에 한 지식인의 (소극적인) 저항적인 발언은 “나무에 관한 대화”로서 취급되어 버리기 쉽다. (각주: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곧/ 그 많은 범죄 행위에 관한 침묵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나 다름없으니,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 (김광규 역, 살아남은 자의 슬픔, 109 페이지) 참조.). 그 뿐 아니라 ‘회색분자’로서의 그의 세계관은 침묵을 낳게 하고, 이러한 침묵은 모든 국가적 정책을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를테면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 노동자 데모 당시의 브레히트의 태도, 1977년 비어만 사건 및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의 뮐러의 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작품 「햄릿 기계」는 다섯 개의 소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와 네 번째 단원은 햄릿의 독백으로, 두 번째와 다섯 번째 단원은 오펠리아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제목이 “햄릿 기계”이지만, 우리는 주인공을 두 인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 단원은 “스케르쪼”라고 명명되어 있는데, 이는 작품의 축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다. (각주: 스케르쪼란 원래 교향곡 실내악 등에 담긴 막간 곡으로서 경쾌한 세 번째 악장을 의미한다.). 또한 「햄릿 기계」가 종래의 극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점에서 발견된다. 첫째, 이 작품은 “나는 햄릿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데, 이는 보통의 극작품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가 무슨 텍스트를 읽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몇몇 구절은 부분적으로 대문자로 쓰여져 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인용이며, 어떤 부분은 관점의 변화를 꾀하기 위하여 그렇게 대문자로 표현한 듯하다. (각주: “창작 시에 사람들은 어느 특정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집필 시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텍스트에 속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내가 스파르타쿠스와 티베리우스의 대화 장면을 쓰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전화를 하여 유머를 이야기하지요. 그때 그 유머는 그 대화에 아주 적합한 것이므로, 작품 속에 집어넣지요.” H. Müller: “Jenseits der Nation”, a. a. O., S. 16.).
둘째,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뮐러는 80 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을 불과 9페이지로 축소시켰다. 이는 뮐러가 작품 속에 일체의 대화를 삭제시킨 때문이다. 햄릿이 처한 대화 단절의 상황은 비어만의 추방령을 염두에 둘 때 작가의 사회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각주: 햄릿이 처해있는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여러 겹의 감시 체계이라고 한다. 설준규/ 서강목: 영미 문학의 현황과 과제, "햄릿의 경우", 서울 1991, 창비 겨울호, 133 페이지.). 셋째, 「햄릿 기계」에서는 어느 배우가 어떠한 역을 맡아야 하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작가는 무대의 상황과 현실적 상황을 의도적으로 구분시키고 있지 않다. 넷째, 때와 장소의 언급이 없다. 뮐러가 연극 상연의 기본적인 조건이 되는 때와 장소를 의도적으로 삭제시킨 것은 아마도 두 가지의 이유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 하나는 문학적인 소재를 셰익스피어와 결부시켜서 ‘현재와는 전혀 무관한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다는, 이른바 역사주의적인 해석을 피하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작가가 왜 연극이 상연되는가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각주: 상기한 다섯 가지의 지적은 필자의 견해가 아니고 다음의 책에서 인용했음을 밝혀둔다. Siehe Gespräch mit dem Regisseur Volker Geissler über die Kölner Inszenierung der Hamletmaschine, in: Theo Girshausen (hrsg.), Heiner Müllers Endspiel Hamletmaschine, Köln 1978, S. 66f.). 다시 말해서 극적인 내용이나 줄거리의 전달이 문제되는 게 아니라, 왜 구 동독의 지식인이 햄릿과 같이 갈등을 떨쳐버릴 수 없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4.
“가족 앨범”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첫 번째 단원은 그 문학적 관점에 있어서 세 가지의 차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햄릿이 처한 현재의 상황, 시적인 언어로 표현된 지난 이야기, 내면적 의식 속에서 흐르는 햄릿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해변 가에서 서있는 햄릿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생각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갈등에 빠진다. 그러니까 그는 아버지의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해야 할지, 아니면 무언가 잘못된 현실을 잊고 그냥 순응해야 할지 고민한다. 햄릿의 부친에 대한 사랑은 과거의 거대한 이상을 고수하는 것으로 풀이된다면, 부친의 죽음은 그것의 파괴 내지는 왜곡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선량한 햄릿이에요 내게 비탄의 이유를 전해주세요
아, 전 지구가 실제로 어떤 슬픔에 잠겨있어요
리처드 3세인 나는 왕자를 살해한 왕이로다
오 나의 백성들이여 너희를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는 마치 곱사등이 마냥 육중한 뇌를 끌고 있을 뿐
공산주의의 봄날에 까부는 광대인가
희망의 시대에 무언가가 썩어 있도다
흙을 헤집어서 그걸 달에 날려버려라”
인용문에서 1행부터 4행까지, 그리고 7행부터 8행까지는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에서 인용한 것 같아 보인다. (각주: 제 2행에서 ’전 지구‘ (THE WHOLE GLOBE) 라는 표현은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는 “무대”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리처드 3세"는 셰익스피어의 (비교적) 초기 작품으로서 여기서는 왕의 살인자의 예로서 사용되었을 뿐, 내용상 「햄릿 기계」와는 커다란 관련성은 없다. 제 5행과 제 6행은 하이너 뮐러의 작품 「건설」 (1964)에서 인용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기술자 하셀바인이 등장하는데, 자신의 어정쩡한 태도를 한탄하고 있다. (각주: H. Müller: Geschichten aus der Produktion, a. a. O., S. 92; W. Schivelbusch: Sozialistisches Drama nach Brecht, Darmstadt 1974, S. 114 - 124.). 그러니까 자신의 사고와 객관적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며, 무언가를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학대하고 있다.
마지막 제 7행과 제 8행은 유명한 헤카베의 독백으로서, 트로이가 패망할 당시에 왕비인 헤카베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흙”이란 패망한 트로이만을 지칭할 뿐 아니라, 구동독의 땅을 암시하고 있다.
이때 햄릿은 유령을 접하며, 아버지의 사망 원인을 알게 된다. 즉 햄릿의 어머니 게르트루트와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권력과 사랑 때문에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극적인 진행은 오직 햄릿의 독백으로 이어질 뿐이다. “거의 관습으로 되어 있으므로 나 역시”/ “가까이 있는 살덩이와 그 다음의 살덩이에다”/ “칼을 꽂아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빌붙어 살아야 하는가”/ “주인이여 술집 의자가 부러질 때 내 목을 부러뜨려다오”. 이 대목은 첫 번째 단원에서 햄릿의 고뇌를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다. 제 4행은 하이너 뮐러의 「농부들」 (1956/61/64)에서 인용된 구절이다. 이 작품에서는 폰드락이라는 인물이 개인의 자기실현으로서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요구하고 있다. (각주: Theo Girshausen, a. a. O., S. 10.).
햄릿의 독백은 호레이쇼의 무대 등장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극중극의 상황 속에서 햄릿은 호레이쇼로 하여금 오펠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우스의 역을 맡도록 권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호레이쇼는 햄릿의 절친한 친구이며 극기주의자로서 등장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기회주의적인 국가 관료주의자의 전형으로서 등장한다. 그렇기에 햄릿은 그에게 폴로니우스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그를 살해하려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원에서 나타나는 햄릿의 마지막 독백은 창녀인 어머니를 겁탈함으로써 복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속 이어집니다.)


'45 동독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설호: (4) 지식인의 갈등과 세계의 변화 (0) | 2025.07.08 |
|---|---|
| 박설호: (3) 지식인의 갈등과 세계의 변화 (0) | 2025.07.05 |
| 박설호: (1) 지식인의 갈등과 세계의 변화 (0) | 2025.07.01 |
| 박설호: (4) 귄터 쿠네르트, 혹은 노아의 방주로서의 시 (0) | 2025.06.10 |
| 박설호: (3) 귄터 쿠네르트, 혹은 노아의 방주로서의 시 (0) | 2025.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