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박설호: (4) 갈망의 무게, 혹은 성취의 우울

필자 (匹子) 2025. 6. 14. 09:10

(앞에서 계속됩니다.)

 

4. 사랑은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여행이다.

 

베타: 이번에는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취의 우울이라는 정서는 그의 작품에도 나타나는지요?

알파: 그렇습니다. 스스로 갈구하던 바가 충족될 때 우리는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유약한 시인, 니콜라우스 레나우는 생전에 수없이 심리적 파멸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각주: 니콜라우스 레나우 (1802 - 1850): 헝가리 오스트리아 출신의 시인. 1832년에서 1833년까지 북아메리카에서 원시림을 개발하여 독자적인 삶을 추구하다가,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특유의 우울증과 내적 갈등으로 1844년부터 죽기까지 요양원에서 머물렀다. 특히 서사시 「알비겐 파」, 「사보나롤라」 등이 유명하다.). 그는 한 여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마치 “신기루Fata Morgana”와 같다고 느꼈지요.

 

감마: 레나우는 고독과 모험 그리고 방랑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시인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사라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왕정복고라는 분위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수주의의 정체성 내지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그의 작품 곳곳에 배여 있습니다. 레나우는 1832년 7월에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연인과의 이별을 통해서, 자신의 아픈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알파: 그렇지만 레나우가 미국으로 떠난 것은 여성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폐쇄적이고 경직된 유럽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를 멀리하고, 새로운 땅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꿈을 실천하고 싶었지요.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의 땅을 매입하여 개간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현실적 조건은 자신이 기대하던 바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개척자들은 오로지 이기주의의 자세로 황금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1835년 레나우는 “몰락의 땅” 미국을 등지고 유럽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베타: 이때 집필된 작품이 바로 「동경의 변모 Wandel der Sehnsucht」였군요.

 

항해는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

오,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광활한 낯선 곳의

황량한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고향 해안을 그리워했는가.

 

마침내 꿈에 그리던 땅이 손짓하였네,

환호하며 고귀한 해변으로 신속히 달려갔어,

고향의 나무들은 다시 푸르른 청춘의

꿈으로 나에게 인사를 보내었네.

 

성스럽고 어쩌면 달콤한 새들의 노래,

전에 없던 말을 내 귀에 들려주네, 그래

그렇게도 고통스러운 이별 후에 나는

가슴속의 모든 돌을 치워버리고 싶네.

 

하나 너를 발견했을 때, 모든 기쁨은

죽음의 흔들림으로 너의 발아래 가라앉고,

내 마음속에 고적하게 남아있는 것은

무한한, 절망적인 사랑뿐인 것 같아.

 

오, 나는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다시

둔탁한 밀물의 파도 소리를 동경했던가!

항상 그저 고독하게 성난 바다 위에서

너의 아름다운 모습과 교우하고 싶구나!

 

(각주: 원문은 다음과 같다. “Wie doch dünkte mir die Fahrt so lang,/ O wie sehnt ich mich zurück so bang/ Aus der weiten, fremden Meereswüste/ Nach der lieben, fernen Heimatküste.// Endlich winkte das ersehnte Land,/ Jubelnd sprang ich an den teuern Strand,/ Und als wiedergrüne Jugendträume/ Grüßten mich die heimatlichen Bäume.// Hold, und süßverwandt, wie nie zuvor,/ Klang das Lied der Vögel an mein Ohr;/ Gerne, nach so schmerzlichem Vermissen,/ Hätt ich jeden Stein ans Herz gerissen.// Doch, da fand ich dich, und todesschwank/ Jede Freude dir zu Füßen sank./ Und mir ist im Herzen nur geblieben/ Grenzenloses, hoffnungsloses Lieben.// O wie sehn ich mich so bang hinaus/ Wieder in das dumpfe Flutgebraus!/ Möchte immer auf den wilden Meeren/ Einsam nur mit deinem Bild verkehren!” (Nikolaus Lenau: Sämtliche Werke und Briefe. Band 1, Leipzig und Frankfurt a.M. 1970, S. 23-24.)

 

알파: 사랑이란 블로흐에 의하면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여행 Liebe ist eine Reise in ein gänzlich neues Leben”이라고 합니다. 자고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받아들이는 일이지요.

베타: 동의합니다. 사실 누구를 만나 해로하는가에 따라서 한 인간의 삶은 완전히 달리 전개되니까요. (각주: 정현종 시인의 표현을 빌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방문객」) ).

알파: 그래서 서양사람들도 사랑하는 행위를 흔히 “그대가 내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You came in my life.”라고 표현하지요.

감마: 네. 사랑은 일시적으로 당사자의 눈을 멀게 하니까요.

 

알파: 일단 레나우의 시를 정독하기로 합니다. 시는 시적 자아의 기대감과 실망감이 교차하는 현상을 그대로 전해줍니다. 시인은 오랫동안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살다가, 꿈에 그리던 임을 만나러 고향으로 되돌아옵니다. 연정은 머나먼 낯선 곳에서 강한 그리움으로 변화되었으나, 사랑하는 임을 직접 대하게 되었을 때 시적 자아는 처절한 실망감을 감지하게 됩니다.

델타: 세 연과 마지막 두 연에 묘사된 시적 자아의 심리적인 상태는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네요. 시적 자아는 “고향”의 “해안”에서 “새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지나간 청춘을 기억합니다. 이번에는 과거에 품었던 “가슴 속의 모든 돌”을 치우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여인과 만나려고 합니다. 해변에서 고향의 나무들과 만나고, 새소리를 듣습니다. 4연에서 시인은 그미를 “발견”하게 되지만, “죽음의 흔들림”이 그를 가로막고 맙니다. “기쁨”이 사라진 무한한 절망감만 느낄 뿐입니다.

 

알파: 네, 시인이 사랑하던 샤를로테 그멜린 Charlotte Gmelin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요. 레나우는 다시금 바다 위의 여객선에 머물면서, 방랑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이상적 상은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 여지없이 폭파되고 맙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랑은 찬란한 허상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항상 그저 고독하게 성난 바다 위에서/ 너의 아름다운 모습과 교우하고 싶구나!”

 

베타: 사랑의 대상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자신의 상(像)인 것 같아요.

알파: 예리한 지적입니다. 많은 젊은이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 내지는 자신의 사랑하는 상을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젊고 매력적인 약혼녀 레기네 올젠 Regine Olsen과 백년해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수사의 길을 걷고 싶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결혼 생활로 인하여 행여나 그미에 대한 깊은 사랑이 파괴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베타: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근 셈이로군요. (웃음)

알파: 그러게요. 찬란한 사랑의 상을 깨뜨리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야 영원한 사랑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으리라고 착각합니다. (각주: 이는 키르케고르가 1866년 홍등가를 방문하여 창녀와 성행위를 나눈 다음에 느낀 죄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Peter B. Rohde: Kierkegaard, Rohwohlt bei Hamburg 1988, S. 36.). 어느 날 그미가 파혼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일상에 멍청한 철학자는 죄의식에 사로잡히면서, 행여나 그미가 자살할까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키르케고르는 평생 레기네 올젠을 그리워하며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그미가 삶에서 얻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키르케고르의 후회의 편지 그리고 유산으로 남긴 그의 저작물이었습니다.

 

델타: 신학을 공부하다가 키르케고르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일기장에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아름다운 처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어떠한 남자라고 하더라도 나만큼 부인에게 지조를 지키는 자도 없을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어리석은 남자 혹은 금욕주의자의 가식적 표현이나 다름이 없겠지요? “그미는 누군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는 나의 조언을 정확히 이해하였다.

알파: 그렇지만 제삼자인 우리가 키르케고르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뒤늦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요. 어쨌든 철학자의 마음속에는 플라톤주의적 사랑이 오래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세의 방랑 시인의 연애 봉사 내지는 마리아에 대한 금욕적 사랑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