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설호: (4) 귄터 쿠네르트, 혹은 노아의 방주로서의 시
(앞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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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쿠네르트가 환경 파괴에 대한 어떠한 대안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시 창작 작업을 결코 회피할 수 없는 몰락을 견뎌내려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비유하곤 하였다. 그러니까 오늘날 시인은 쿠네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지진 자체에 대해 책임질 수 없는 시대의 지침계 Seismographen, die nicht für das Erdbeben verant- wortlich zu machen sind”일 뿐, 일반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시인에게 몇 가지 사항을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시작품이란 과연 그의 주장대로 “이 세상이 온통 물에 잠기기 전에” 어떠한 전체주의적 폭력에도 기만당하지 않고 스스로 견딜 수 있는 매개체일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수동적으로 믿기에는 인간 동물은 지적 야수 (知的 野獸)이며, 너무나 커다란 욕망의 담지자가 아닌가? 둘째로 시인은 실제 현실의 끔찍한 상황을 인간의 인식의 차원 속으로 이전시켜, 독자에게 근본적으로 허무와 죽음만을 은근히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실제 현실적 상황에 대한 자각 그리고 이에 대한 판단과 입장 등이 어떻게 하나의 동일한 차원에서 결합될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우리는 최소한 생태계 파괴에 대한 쿠네르트의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가령 마하트마 간디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사치와 낭비를 즐기는 자에게 지구는 볼품없이 작지만,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에게 지구는 풍요로움을 선사할 것이다.” 라는 발언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쿠네르트의 시 「겨울날」은 우리에게 생태학적 사고에서 파생된 겸허함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우리는 고립된 인간의 일회적인 삶 내지는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가 미학 이론에서 지적한 바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나락을 통한 “인간 본위주의에 대한 내밀한 비판”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유리처럼 흰 하늘, 구름 한 점 없다. 안개에서
벗어난 태양보다 눈부신 눈 (雪).
얼핏 보기에는 까만 쇠처럼 혹은
구부러진 수도관 같은 벗은 나무들, 아무런
도움 없이 형성되어 있다. 가느다란 바람이
던지는 차가운 마취.
(Der glasweiße Himmel wolkenlos. Greller als/ Die dunstfreie Sonne: der/ Schnee. Aus schwarzem Eisen scheinbar und/ Verbogenen Röhren die nackten Bäume, unbeholfen/ Geformt. Die kleine Brise/ Bringt eisige Lähmung.)
조용한 집의 (약간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서리 꽃 핀 창문 뒤에는
희미하게 어떤 얼굴이 보인다.
(Hinter der frostgeblümten Scheibe/ Des stillen Hauses (ein wenig steigt auf))
고립된 채 거기 살아가는 자를
여행자는 부러운 듯 차창을 통해
스쳐볼 뿐, 그렇게 외로운 자가
하루, 눈 그리고 나무들처럼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는 걸
깨닫지 못하며.”
(Den dort/ In der Abgeschiedenheit Wohnenden/ Sieht im Vorbeifahren der Reisende mit/ Neid: uneingedenk/ Daß spurlos gleich diesem Tage, gleich dem/ Schnee und den Bäumen, vergehen wird, wer so/ Einsam ist.)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