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설호: (4) 학생들과 함께 읽는 브레히트의 시, '후세사람들에게'
(앞에서 계속됩니다.)
5. 세 번째 시 분석
「후세 사람들에게」의 세 번째 시에서는 ‘우리’가 화자로 등장한다. ‘우리’는 후세 사람들인 ‘너희’에게 말을 전한다. 실제로 많은 현대 독일 시인들은 “세 번째 시에 나타난 브레히트의 발언은 그들 자신에게 직결되고 있다.”고 믿었으며, 제각기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각주: 필자는 여기서 이에 관해 천착할 수가 없다. 다만 학생들을 위하여 관련 문헌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Heiner Müller: Variation auf Brecht Verse, in: Sinn und Form 1965, H. 3/ 4, S. 508; Ralf Grüneberger: Frühstück im Stehen, Gedichte, Halle/ Leipzig 1986, S. 32; Hans Magnus Enzensberger: Weiterung, in: ders., blindenschrift, Frankfurt a. M. 1964, S. 50; Steffen Mensching: Im Spätsommer, in: ders., Erinnerung an eine Milchglasscheibe. Gedichte, Halle/ Leipzig 1984, S. 58; Günter Kunert: Alte Zeitschriften, in: ders., Warnung vor Spiegeln, München 1970, S. 68.). 어쩌면 브레히트는 시의 독자로서 후세 사람뿐이 아니라, 동시대인도 계산해 넣었는지 모른다. 이미 언급했듯이 의도적인 비가 풍의 발언, 체념과 회상 형식은 그 자체 창작 방법론으로서 자신의 이상적 사고를 감추는 도롱이의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가 몰락한 그곳의
밀물위로 출현하게 될 너희들이
우리의 약점에 관해 말한다면,
한번 생각해 보라,
너희가 빠져 흘러나오게 된
참담한 시대 또한.
인용한 연은 자세한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필자는 다만 몇 가지 보충 사항을 지적하고자 한다. “밀물”은 주지하다시피 태풍이나 홍수가 사라진 후에 나타나는 자연 현상이다. 브레히트의 단시 「호라티우스를 읽으며 Beim Lesen des Horaz」에서도 나타나지만, 브레히트에게 자연은 주로 어떤 다른 무엇을 상징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후세 사람들은 살아남아, 우리의 “약점”에 관해 말할 것이다. “약점”이란 세계관속에 내재한 취약점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명분이냐, 실리냐? 하는 순수한 전략적인 문제에서 나온 오류도 아니다. 오히려 약점이란 여기서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변절하는 지식인의 태도이다. 어디 지식인의 태도 자체만이 문제일까? 그러한 갈등과 모순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회적 현실이 아니었는가? (각주: "갈릴레이의 생애": (안드레아) “불행하도다, 영웅이 없는 나라는!”. (갈릴레이) “불행하도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제자백가의 시대는 춘추 전국 시대였다. 어려움 없는 현실 상황에서는 영웅이 출현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발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며, 계급의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절망적으로.
거기에 불법이 있더라도 격분하지 말라.
망명은 브레히트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비롯한 게 아니었다. 만약 시인이 자발적으로 망명 국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망명’ 내지는 ‘이주’이리라. 브레히트는 자신의 방랑을 망명으로 규정하지는 않고 “추방”으로 규정했다. (각주: B. Brecht: Über die Bezeichnung Emigranten, in: ders., WA. Bd. 9, S. 718.). 그렇기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가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에리히 프리트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인용문에서 “계급의 전쟁”은 히틀러 전쟁 뿐 아니라, 스탈린의 폭정과도 관련된다. (각주: E. Fried: Interpretation, in: W. Hinck (hrsg.), Ausgewählte Gedichte Brechts mit Interpretationen, Frankfurt a. M. 1978, S. 96f.).
실제로 브레히트는 1947년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취조를 당한 적이 있고, 1950년대 이후에는 구동독의 문화 관료들로부터 체제 비판적 작가로 취급당하며,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각주: Siehe M. Esslin: Das Paradox des politischen Dichters, Frankfurt a. M. 1962; auch Vgl. G. Kunert, Das Gedicht als Arche Noahs, München 1985, S. 76.). 평생을 일관된 지조를 견지하며 살아온 지식인이 때로는 ‘빨갱이’로, 때로는 ‘반동분자’로 몰리는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개인의 개별적 입장은 조변석개하는 사회적 통념에 의해 굴복 당하곤 한다. 브레히트가 겁많은 지식인이라고 결과론적으로 매도하기란 쉽다. (각주: Vgl. M. Rohrwasser: Ist also das Schweigen das beste?, a. a. O., S. 8f.). 다시 말해 주어진 권력 및 이해관계를 벗어난 상태에서 과거의 지식인들을 비난하기는 쉽다. 허나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뒤섞인 채 지조와 융통성을 함께 견지하기는 어렵다. 후세 사람들이 빙산 일각의 이유만으로 과거 사람들의 잘잘못을 한 치의 오차 없이 평가할 수 있을까? (각주: 두 번째 시의 첫 연 4행과 비교하라. 시대의 소용돌이에 처해 있는 동 시대 인들은 “격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난세를 벗어난 사람들은 과거의 지식인들에 대해 무조건 “격분”하지 말고, 난세를 아울러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네,
저열함에 대항하는 증오 역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을.
불법에 대한 노여움 역시
목쉬게 만드는 것을. 아, 우리는
이 땅에 친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자신에게도 친절할 수 없었네.
흔히 말하건대 영웅이란 사회적 이상을 개인의 삶과 일치시키려는 자이다. 소시민들은 개인적 성공에만 집착한다. 그들 가운데 선량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정, 친구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불행한 자들을 돕는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와 역사적 진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 발뺌한다. 그러나 지식인은 이들과는 다르다. 옳든 그르든 간에 그들은 사회 발전에 대한 견해를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 특히 브레히트와 같은 지식인은 자본주의적 물신 구조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며, 사회적 이상을 나름대로 설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회적 이상의 실천에는 수많은 제한이 따른다. 이러한 제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개인적 불행이다.
시인은 저열함에 대항하나, “얼굴을 찌푸”려야 한다. 불법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높이면, 자신의 목은 상하기 일쑤이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시인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박탈당한다. 이는 나아가서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친다.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면, 개인적 자유가 억압당하고, 개인적 자유에만 집착하면 사회적 이상은 결코 실천되지 않는다. 이게 바로 브레히트 전 문학에 걸쳐 나타나는 모순 구조의 전형적인 유형이자, 지금까지의 네 가지 갈등과 모순들을 수렴하고 있는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각주: 예컨대 "사천의 선인"에서 선량한 센테는 자기 파멸을 막기 위하여 사악하고 계산적인 수이타로 변하며, "코카사스의 백묵원"에서 그루셰가 아이의 삶을 위해 노력하면, 자신의 삶은 불행의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렇기에 시인은 “이 땅에 친절을 마련하려”는 거룩한 사명감을 실천하기는커녕, 자신의 행복조차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에 인간이 인간에 대한
조력자가 되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너희는
우리를 생각하라,
관용으로.
마지막 연에서 비로소 시인이 생각한 이상 사회, 즉 “목표”가 막연하게 묘사되고 있다. 즉 이상 사회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늑대 Homo homini lupus”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 대한 조력자”로서 살아가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은 “도래한다면”이라는 표현이다. 원문에서 브레히트는 어색하게도 ‘werden’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미래의 조동사는 3인칭에서는 주로 추측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조건문에서 그것이 사용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그렇다면 브레히트가 어색하게 들리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첨가했을까? 이 질문은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 어쩌면 시인이 자신의 시대, 그러니까 기존 사회주의의 사회에 살던 동독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브레히트는 “인간이 인간에게 조력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은 자신의 현세에 출현하지 않으리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후세 사람들”을 단순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억압이 종결된 세상에서 살계 될, 미래의 가상적 대화 상대자들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 비어만의 시 「브레히트 그대의 후세 사람들」에서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 자기 자신에게 전적으로 관용을 베풀고/ 신발보다도 더 자주 지조를 바꾸며/ 옳아,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쉬지 않네/ - 더 이상 말할 게 없을 테니까/ 그들의 얼굴은 더 이상 찌푸려지지 않네, 옳아/ 그들은 얼굴을 상실했으니. 마침내/ 인간은 늑대에 대한 늑대가 되었네/ 브레히트, 너의 후세 사람들은/ 때때로 이들은 나에게/ 재앙을/ 내리네.” Siehe W. Biermann: Für meine Genossen, Berlin 1972, S. 33 - 35. 이로써 비어만은 아직 조력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동시대인들을 비판하려고 하였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