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근대영문헌

서로박: (1) 모리스의 '유토피아 뉴스'

필자 (匹子) 2025. 5. 18. 09:02

1. 소규모 코뮌 공동체의 유토피아: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1834 – 1896)는 19세기 말 런던의 시대적 현실을 반영한 이상사회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는데, 아름다운 수공예 예술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즐거운 노동, 멋진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그의 유토피아는 코뮌 공동체의 유토피아에 편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대한 국가 체제를 근거로 설계된 사회주의 유토피아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박경서: 55). 실제로 모리스는 이른바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의 국가 중심의 개량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개량 사회주의란 혁명 대신에 의회주의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운동을 가리킵니다.

 

모리스는 국가의 해체가 사회주의의 근본이라고 파악했으며, 국가 중심의 사회 체계의 메커니즘에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박홍규: 367쪽). 모리스는 독일의 사회주의 사상가, 빌헬름 바이틀링의 농촌 중심의 기독교 사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아나키즘 코뮌운동이라는 놀라운 모티프를 제시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나중에 루돌프 슈타이너의 대안교육이라든가, 약 100년 후에 생태공동체 운동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목, “유토피아 뉴스”는 자구적으로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부터의 소식News from no-where”인데, “지금 이곳으로부터의 소식News from now-here”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모리스는 사려 깊은 숙고 끝에 “최상의 곳 (Eu+ Topos)”과 “없는 곳 (U + Topos)”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진의를 그런 방식으로 탁월하게 표현하였습니다.

 

2. 단아하고 목가적인 농촌 중심의 수공업적 이상 사회: 모리스는 아나키즘 코뮌 운동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19세기 유토피아의 흐름에서 생략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기계 문명을 철저하게 거부했다는 점에서 토마스 칼라일 그리고 존 러스킨보다도 더욱 근본적으로 자연 친화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나아가 모리스는 마르크스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마르크스보다도 더욱 치열하게 사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예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기존하는 사회의 생산 양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자 운동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들에 비해서 모리스는 기존하는 사회적 상황에 대해 하나의 이상적인 대안을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의 황폐한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는, 어떤 단아하고 목가적인 농촌 중심의 수공업적 이상 사회를 가리킵니다. 이는 중세의 삶이라는 근원적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크고 작은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모리스의 유토피아는 “과거 지향적 미학”, “낭만적 반자본주의”, “취향에 입각한 사회주의” 등으로 평가되었습니다. (Reifsteck: 5).

 

 

3. 모리스의 삶 (1) 청년 시절: 모리스는 건축가, 시인, 화가, 기술자, 양탄자 제작자, 인쇄업자 등 다양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렇기에 모리스가 작가로서보다는, 오히려 화가, 특히 다양한 미술공예 운동 그리고 청년양식 운동의 선구자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834년 3월 24일 영국 에섹스 지방의 월섬스토라는 마을에서 증권회사 소개상의 큰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월섬스토는 런던 근교의 자그마한 마을이었고, 농촌의 전원적인 분위기가 온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증권 거래를 통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모리스의 가족은 풍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리 광산에 투자하여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1847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모리스는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학교생활은 지루함만 안겨주었습니다. 말보로 대학의 부속학교에서 배운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학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혼자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지냈습니다.

 

4. 모리스의 삶 (2): 모리스는 1853년부터 옥스퍼드에 있는 엑서터 칼리지 그리고 버밍햄의 킹 에드워드 그렘머 학교에 다니기 시작합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영국의 사회 사상가이자 예술 비평가,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 – 1900)도 있었습니다. 러스킨은 기계의 노예로 전락한 영국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안타깝게 여기며, 장식 없는 현대 건축과는 다른 중세 고딕 건축을 찬양했습니다. 모리스는 이에 영향을 받아서 1854년 친구들과 함께 벨기에 그리고 북부 프랑스를 여행 하였습니다. 유럽 여행은 모리스에게 거대한 영감을 부추겼는데, 이는 결국 그의 관심을 예술 쪽으로 돌리게 했습니다. 당시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테니슨, 칼라일 그리고 존 러스킨 등의 문화 비판의 서적이었습니다. 가령 칼라일의 『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 러스킨의 『베네치아의 돌The Stones of Vinice』등의 책이 거론될 수 있습니다. 그밖에 신앙 대신에 예술로 방향전환하게 된 계기는 깊은 사랑의 감정을 불어넣게 한 아내, 제인 그리고 놀라운 예술적 모티프를 제공한 라파엘로의 그림이었습니다.

 

5. 모리스의 삶 (3): 모리스는 1861년부터 수공업 관련 회사를 창건하여, 유리 제품, 가구 그리고 실내 장식의 제품들을 생산하였습니다. 1878년부터 그는 양탄자 제조업에 뛰어들어서, 수제 양탄자를 생산해냅니다. 사업이 안정되자, 그는 역사적 건물 보존 그리고 정치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의 노력은 1877년에 역사 건축의 보존 협회의 창립으로 이어졌습니다. 1887년 11월 13일 런던에서는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는 사건이 발발합니다. 자본가들로부터 이용당하던 노동자들은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에 집결하여 데모를 벌였는데, 이때 군인과 경찰의 개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때의 사건이 계기가 되어 모리스는 차제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겠다고 각오합니다. 이 당시에 “민주 연맹Democratic Federation” 그리고 “사회주의자 리그Socialist League” 등의 단체가 결성됩니다. 1884년에 창립된 “민주 연맹”은 조만간 “사회 민주 연맹”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됩니다. 모리스는 1886년에 집필한 「존 볼의 꿈A Dream of John Ball」에서 자신이 현실 문제로 항상 고민하하지만, 때로는 엉뚱한 찬란한 꿈으로 자신의 고뇌를 보상 받는다고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모리스의 문학은 주어진 사회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문학적 시도라고 규정될 수 있습니다.

 

6. 『유토피아 뉴스』의 집필 계기: 그의 대표작, 『유토피아 뉴스, 혹은 휴식의 시대. 어느 낭만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소설의 몇 개의 단락들.News from Nowhere, or an Epoch of Rest, Being Some Chapters from a Utopian Romance』(1890)는 사회유토피아를 담은 소설입니다. 집필계기로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모리스는 벨러미의 『뒤를 돌아보면서』에서 제기된, 산업 군대의 모델에 대해서 결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벨러미의 중앙집권적 유토피아 모델에 비판적으로 대응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생산력의 증가만으로 이룩될 수 있다는 벨러미의 생각은 착각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벨러미는 전체적으로 작동되는 기계주의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결코 벨러미가 생각한 그따위 ‘속된 (런던인의) 천국cocney paradise’에서 살고 싶지 않다.” (Wandel: 50). 19세기 말에 모리스는 열정적으로 정치적 모임에 참여하였습니다. 사회주의 서클의 임원으로서 말하자면 기계가 모든 것을 장악한 빅토리아 시대의 비참한 문명에 하나의 전쟁을 선포한 셈입니다. 19세기의 사회는 “마치 목욕하던 인간이 자신의 옷을 잃어버려서 발가벗은 채 시대 한복판을 달리는 꼴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Berneri: 232). 인간은 자신의 안일한 삶을 추구하다가 최소한의 옷마저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옷은 건강과 최소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암시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