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설호의 시, '곤잘로 라미레스' 해제
시를 발표할 때마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1983년에 완성되었다. 부족한 시편이므로 발표하는 것 자체가 교만하고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함량 미달의 작품을 발표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어리석은 시인이 되기 싫었다. 자신이 모자라면 고개라도 숙여야 한다.
곤잘로 라미레스는 인디언 혈통을 물려받았다. 그의 심리적 여유로움은 뚱뚱한 풍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눈은 서양 사람의 그것과 닮아 있다. 선조 가운데 아마 에스파냐 인도 있으리라. 그러나 메스티초라고 말하기에는 그의 얼굴과 몸에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풍모가 아련히 배여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은 독자에게 낯설게 다가갈지 모른다. 공감하기 어려운, 생경한 분위기를 자아내니까. 볼리비아 출신의 시인 한 사람이 낯선 유럽땅에서 외롭게 살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분들에게는 관심밖의 주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한국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
곤잘로는 뮌헨 어디에서 누구와 살고 있을까? 혹시 남창 (男娼)으로 생활비를 벌고 있을까? 동양인들은 이 여자 저여자 갈아치우는 사내를 바람둥이라고 손가락질 한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바람둥이를 방황하는 영혼이라고 생각하며 연민의 정을 느낀다. 바로 여기서 놀라운 똘레랑스의 차이가 드러난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임 (아내, 혹은 남편, 혹은 남친, 혹은 여친)에게 관대한 마음을 품기는 어렵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사랑하는 임이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해주기를 애타게 바라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질투 내지는 치정(癡情)의 감정으로 돌출하기도 한다. 연정도 과하면, 탈이 난다.
질투심을 느끼는 자, 과도한 음담패설을 즐기는 자는 성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군이다. 그들은 타인의 성에 대해 근엄한 잣대를 내세운다. 그러나 내로남불은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성에 관해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을 품으면, 우리는 "관용"과 관대함을 배울 수 있다.
작품 "곤잘로 라미레스"는 우리에게 다음을 암시한다. 즉 "인간 존재는 어느 누구에게도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마치 파우스트가 두려움 때문에 제 무덤을 파고 봉분 쌓듯이, 우리는 황량한 들판의 삶에서 미어캣처럼 불안하기 때문에 혼인이라는 족쇄에 자청해서 갇히려는 게 아닐까?
곤잘로 라미레스 *
박설호
그대가 내게 선물한
남미 음악의 카세트에는
그대의 희망과 노여움
그대의 참을 수 없는
고독이 배여 있다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대 숨겨 주었다고
단도에 찔린 친구
피가 배인 볼리비아의
진흙이 떠오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커피와 마리화나의 땅
허나 그대 아랑곳없이
투박한 인디언의
미소를 남기곤 했지
곤잘로 언제였던가
그대는 뮌헨에서 내게
에스파냐 글을 보여주었네
시방은 남의 식솔이 된
처자의 뒤엉킨 편지를
신(神)과 혁명 그리고
사랑 노래한 그대의
시(詩)들 하지만 유럽인들
횃불에 둘러앉아서
노래 부를 줄 모른다
서양의 꽃송이들 다만
그대의 남성을 사랑하고
순박한 여자바라기
그들의 차가운 가슴에
불 지필 줄 안다
그대 내게 선물한
남미 음악의 카세트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칠백 마르크의 생활비
망명의 눈물이 담겨 있다
.....................
* 곤찰로 라미레스 (1952 - ): 볼리비아 출신의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 망명 시인
** 실린 곳: 반도여 안녕 유로파, 울력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