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설호: (2) 사라진 동독, 남아 있는 문학
(앞에서 계속됩니다.)
3. 통일 독일에서 겪는 작가적 어려움
구동독 작가들의 국가에 대한 상을 살펴보기 전에 일단 통일된 독일에서 접하게 된 여러 가지 애로 사항을 개관하는 게 바람직할 것 같다. (정도 차이는 있으나) 동독 출신의 모든 작가들은 통일된 독일에서 가혹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쳤다. 가령 뮐러와 볼프를 둘러싼 동독 문학에 관한 논쟁 및 구동독 작가들에 대한 스타지 연루 등이 첫 번째 사항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1989년까지 동독에 남아있던 작가들은 어떠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는가?
(1) 특히 서방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젊은 신진 작가들은 작품 발표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과거에 그들은 사회주의 통일당의 도움으로 최소한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허나 이제는 비정한 시장 경제의 논리가 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게다가 독일의 사회 보장 제도는 기민당의 정책에 의해 현저하게 축소화되었다. 토마스 브라쉬 Thomas Brasch와 같은 몇몇 작가들은 문화 단체의 지원을 받고 글을 썼지만, 유명세가 없는, 이른바 삼류 작가들에게는 작품 발표의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2) 통독으로 인하여 작가의 역할이 변모했다. 동독 시절에는 작가들이란 한 마디로 말해 민중을 교화하는 그룹이었다. 그들은 당과 인민 사이를 이어주는, 말하자면 일종의 전위 군단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실제 동구의 국가들은 -레닌의 영향으로- 지식인의 지적 능력을 중시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당과 인민 사이의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비록 80년대에 이르러 현저히 약화되었지만, 작가 역할에 관한 이러한 기본적 특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과연 통일된 독일에서는 누가 문화 사업의 칼자루를 쥐게 되었는가? 출판사의 편집인 내지는 비평가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독자의 반응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였고 (각주: 여기서 “독자 반응”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콘스탄츠 학파의 문학의 수용에 관한 학문적 이론과 관련되는 게 아니라, 돈 벌기 위하여 독자의 눈치만 생각하는 태도를 지칭한다.), 생존을 위해 “판매고”를 출판의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아야 했다.
(3) 독자들의 독서 관이 변하게 되었다. 서구의 일반 독자들은 대부분 교훈보다 향유를 위해 책을 읽고 있다. 억압된 사회에서 자유의 문제, 가난을 공유하는 협동적 삶에 관한 이야기는 서구의 배부른 노동자에게는 그야말로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 대신에 마약과 섹스 그리고 동성애에 얽힌, 일상적 권태 극복의 이야기 내지는 시니컬한 예술적 표현을 통한 지적 언어적 유희 등이 흥미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써 “배고픈 예술가”는 -아르노 슈미트 Arno Schmidt의 표현을 인용하면- “예술을 다만 인공 거름 내지 인조 꿀로 이해하는” 독자들의 비위를 고려해야 했다. 게다가 구동독 지역에 사는 독자들의 의식 역시 변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독서 국가, 구동독에서는 문학에 관심 없는 자들도 문학 작품을 읽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대체로 미첼, 곤잘리크, 스티븐 킹 등과 같은 대중 작가들의 통속 소설에 몰두하고 있다. 이로써 작가와 지식인이 지녔던 최소한의 권위마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4) 구동독 출신의 작가들은 체험 현실의 차이로 인하여 위화감을 느끼게 되었다. 실제로 서독 지역의 독자들은 구동독에 관한 문학 작품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무릇 자신의 삶과 유사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의 의외로 적극적으로 관심의 촉수를 세우지 않는가? (각주: 비근한 예로 미하일 바쿠닌 Bakunin의 노동 운동을 생각해 보라. 러시아에서 탈옥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차르의 폭정을 전파함으로써, 비참한 러시아를 구제하고 싶었다. 이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쿠닌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당면 문제에 일차적으로 다루었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유럽에서 수많은 지지자를 얻게 된다.). 동독 지역의 독자들 역시 서독의 현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가령 귄터 그라스 Günter Grass의 미지의 영역 Ein weites Feld, 에어빈 슈트리트마터 E. Strittmatter의 "가게 3" 등은 특히 구동독 지역에서만 많이 판매되었을 뿐이다. 변화된 현실 앞에서 작가는 자신의 종래의 문학적 경향을 검토하고, 창작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말하기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문학관을 부분적으로 수정함으로써가 아니라, 기존 문학관 전체를 파기시킴으로써 이룰 수 있는 과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업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을 경우, 젊은 작가는 절필할 수밖에 없었다.
(5) 구동독 작가들은 검열의 상실로 인해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되었다. 실제로 작가들의 뇌리에는 항상 검열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는 자기 검열로 변모되어, 작품 생산에 심한 악영향을 끼치곤 하였다. 구동독에서는 80년대 중엽에야 비로소 “검열 (Druckgenehmigungspraxis”이 공공연하게 논의될 정도였다. 혹자는 검열 제도의 폐지가 어찌 문제가 되는가? 하고 의아해 할지 모른다. 검열이란 폐지되는 게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구동독 작가들 가운데 일부가 통독 후에 “감시의 박탈로 인한 증후군” (쾨니히스도르프)에 시달렸다는 사실이다. (각주: 비근한 예로 수십 년 간 감옥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출옥 후에 특정 장소에서 5분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고 한다. 부자유의 몸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에게 자유란 때로는 가시 방석과 같은 법이다.). 가령 사각의 링에 올라선 도전자는 “기권승”이라는 통보를 받을 때만큼 허전함을 느낀 적은 없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억압적 요건은 역설적으로 창작의 자극제로 작용한다. 검열이 사라진 뒤 구 동독 작가들은 투쟁 대상의 상실로 인해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 시달려야 했는지 모른다.
4. 제 2세대 작가들의 구동독 상
브레히트 이후 가장 탁월한 극작가, 하이너 뮐러에게 통일은 유토피아의 실험 공간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통일된 독일에서 유토피아의 상실로 인해 파시즘의 공룡이 부활하리라 믿고 있었다. 뮐러는 70년대부터 수많은 비판을 감내하면서도 구동독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비 민주주의적 전체주의 국가이지만, 동독은 최소한 반파시즘에 입각한 정신에서 건립된 나라라는 것이었다. 뮐러의 절망과 분노는 그의 장시, 「몸젠의 블록」에서 특유의 표현으로 함축되어 있다.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은 보수주의적 프로이센에서 로마의 역사를 연구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자신의 역사 연구가 잘못 이해되지 않기를 몸젠 스스로 바랐기 때문이다. 뮐러 역시 몸젠을 빌어 자신이 어째서 통일된 독일에서 절필해야 하는가? 를 밝힌 셈이다. (각주: 오동식: 하이너 뮐러의 창작의 장애에 대하여, 박설호 외: 하이너 뮐러 연구, 한마당 1998, 240쪽 - 250쪽 참조하라.).
뮐러의 시 「흡혈귀 Vampir」는 자아 반성의 차원을 뛰어넘어, 은밀히 시대의 반성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탁월한 작품이다. “파티가 끝나고 마스크는 찢겨 있다/ 프롤레타리아와 살인자, 농부와 군인/ 감춰진 여러 입에서 아무 소리도 새나오지 않아/ 나의 시구를 마치 무지개 빛깔로/ 절벽에 찢기게 했던 권력은 흩어지고/ 이빨 울타리 속에서 마지막 외침은 죽어버렸다/ 수사반장님, 보쿠타에 온 걸 환영합니다/ 내 주위엔 장벽 대신 거울이 드리워져 있고/ 시선은 내 얼굴을 찾는데, 유리는 텅 비워져 있다.” (각주: 이 시에서 “보쿠타”란 구소련의 도시로서 강제 수용소가 있는 지역이다. 이 대목이 상징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오늘날 통일된 독일에서는 구 동독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모두 마치 옛날의 포로수용소와 같은 곳에 수감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말이다.).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자괴감,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바뀐 가치 전도된 세상, 지금까지의 작가의 피맺힌 노력이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린 변화된 시대적 현실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뮐러의 작품은 소름 끼치는 극한적 특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깊이 파고들면, 우리는 어떤 합리적 결론 내지는 인간 동물 (어떠한 인종이든 간에) 자체에 대한 따뜻한 애정 등을 느낄 수 있다.
하이너 뮐러와 함께 통독 후 극심한 비난을 당했던 크리스타 볼프는 1996년 장편 소설 "메데이아"를 발표하였다. (각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학 작품에 원용되던 “메데아 소재”는 20세기에 들어서 프랑스 작가인 장지로도 Jean Giraudoux, 함부르크 출신의 오르겔 제작자이자 소설가 한스 헤니 얀 H. H. Jahnn에 의해서 극작품으로 발표되었으며, 최근에는 하이너 뮐러에 의해 단막극, 「메데아 유희」로 탄생되었다.). 이 작품은 여성 운동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남동생의 시체를 거두기 위하여 법을 어기다가 비극을 맞이하는 여인을 묘사하고 있다면, 볼프의 "메데이아"는 이아손과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한 여인의 끔찍한 복수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과연 메데이아의 복수만이 소설의 축을 이루는 유일한 주제로서 부각될 수 있을까? 혹자는 메데이아의 고향, 콜히스와 이아손의 땅, 코린트의 대비가 사라진 동서독의 운명을 지칭한다고 유추할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작가는 "메데이아"에서 황금만능주의가 횡행하는 비정한 능률 사회로 전락한, 통일된 독일을 비판하려 했다. 역사성과 현재성 사이 담긴, 주제의 조화는 이미 "카산드라"에서 시험되지 않았던가?
어쨌든 "메데이아"는 어떤 유일한 해석을 거부하는 작품이다. 독일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보내야 하는 볼프로서는 조금도 오해의 소지를 남기려 하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크리스토프 하인 Chr. Hein이 호른의 최후에서 실험한 바 있듯이, 여러 다른 인물의 독백을 통해 모든 것을 서술하려고 시도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필자는 헤르만 칸트 Hermann Kant에 관해서 전혀 지면을 할애하고 싶지 않다. 비록 그 역시 다만 몇몇 좋은 작품을 남겼지만, 작가 회의 의장으로서의 동료 작가들에 끼친 칸트의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귄터 드 브륀은 볼프나 뮐러와는 달리 처음부터 개혁 사회주의를 지향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적 진보에 대해서 내심 불신했던 드 브륀의 태도는 마치 시인 귄터 쿠네르트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쿠네르트가 어떠한 종교, 어떠한 문화 운동에도 추종하지 않았다면, 드 브륀은 처음부터 가톨릭주의에서 박애 정신과 겸허함을 찾았다. 그렇기에 그가 하인리히 뵐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드 브륀은 (후일담이지만) -뵐과는 달리- 사회주의에서 어떠한 장점을 발견하려 하지 않았다. 작가의 관심사는 오직 감추어진 개인사, 베를린 일상의 겸허한 사람들에 국한되었다.
소설은 드 브륀에게 전체적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을 은폐시키기에 가장 적당한 장르였는지 모른다. (각주: 가령 1971년에 발표된 장편 문학상 수상 Preisverleihung에서 비평가인 주인공 테오 오버벡은 문학상 수상 연설을 맡게 되는데, 기회주의적 작가, 파울 슈스터의 작품이 졸작이라고 공공연하게 비판할 수 없어서, -저항의 표시로- 짝이 맞지 않는 구두를 신은 채 식장에 나간다. 1981년에 발표된 장편 "마르크 지방의 연구 Märkische Forschungen"에서는 멘첼 교수가 등장하는데, 그는 경력과 권력에 굶주린 나머지 역사적 자료를 조작하여, 경쟁적 연구자인 사 강사 에른스트 푀취를 실업자로 전락하게 만든다.). 그밖에 드 브륀은 통독 후 기이하게도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마르틴 발저 Martin Walser)처럼 “통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즉시 공언했기 때문일까? 한마디로 드 브륀에게 구동독이란 스탈린주의의 억압이 횡행하는 독재 국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부리당의 당나귀에서 문학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드 브륀은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을 감추면서, 은밀히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해 왔던 것이다.
(걔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