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3) 속죄와 자기 반성으로서의 기억. 보브롭스키의 '유년'

필자 (匹子) 2025. 5. 9. 09:03

 

(앞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혹은 사내들은 말을

데리고 강둑길로 나와,

찬란한 고동색 말을 타고

웃음을 터뜨리며

깊은 곳을 뛰어 넘었지.

(Oder die Burschen kamen

den Uferpfad her mit den Pferden,

auf den glänzenden braunen

Rücken ritten sie lachend

über die Tiefe.)

 

제 1행에서 “혹은”이라는 표현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표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제 3연, 제 4연 그리고 제 5연에서 언급되는 내용이 과거 유년 시절에 대한 완전한 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상기한 연에서 묘사되는 것은 유년 시절에 겪었던 체험이라기보다는, 그 이후,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에 말을 타고 놀던 시절이라고 해야 타당할 것입니다. 특히 동프로이센 지역의 사람들은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70년대에 자신의 첫 번째 부인, 발트해의 리가 출신의 엘제 폰 슈트리츠키를 회고하면서 말한 적이 있는데- 기마 민족의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곳 지역의 사람들은 안장 없이 말 타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제 3행의 “찬란한 고동색 말” 그리고 제 5행의 “깊은 곳을 뛰어 넘”는다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아이들이 자라나서 히틀러가 지향한 국가 사회주의를 답습하고 그 노선에 추종한다는 가설 말입니다. 가령 나치의 돌격대 대원들은 1938년 이전에 그리고 그 이후에 고동색 셔츠를 입고, 체제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인종들의 집과 가게를 불태우곤 하였습니다.

 

울타리 뒤에서

벌 떼의 소란이 하늘을 덮고

갈대 호숫가 가시덤불 사이로

나중에 두려움의 은 딸랑이가

지나쳤지.

성장한 산울타리 사라지고

암울함, 창문 그리고 문.

(Hinter dem Zaun

wölkte Bienengetön.

Später, durchs Dornicht am Schilfsee,

fuhr die Silberrassel

der Angst.

Es verwuchs, eine Hecke,

Düsternis Fenster und Tür.)

 

제 6연부터 밝고 평온한 분위기는 “암울”하고 “두려”운 정조로 반전되고 있습니다. 제 2연에서 “갈대 위로 붉은 딸기 이어진 숲가”는 “갈대 호숫가 가시덤불”로 변화되고, 자연은 마구 헝클린 채 버려져 있고, 울타리는 사람들의 배회를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그밖에 “딸랑이”는 원래 아이들의 놀이 기구로서 양철로 이루어진 둥근 공에 줄이 달린 것인데, 그 속에 구슬이 들어 있지요. 줄을 흔들면, 딸랑이는 금속성의 굉음을 냅니다. 추측컨대 “은 딸랑이”를 사용한 사람은 히틀러 청년단 (HJ)에 속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행군하면서 도시와 시골을 돌아다녔고,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던질 경우) 자신의 친부모들마저 고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 점을 "제 3제국의 공포와 비참함 Furcht und Elend des dritten Reichs"의 제 10장에서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자유롭게 이전할 수 있던 자유는 울타리에 의해 박탈당하고, 평화로운 자연의 정적은 벌 떼의 소음으로 바뀌는 것도 아이들의 행군과도 관련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6행과 7행의 모호한 표현에 있습니다. 6행, “성장한 산울타리”를 “사라”지게 한 주체는 암울함입니다. 그러니까 입구는 사라지고, 전망은 조금도 보이질 않으며, 세상은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어두움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유년 시절에 시인에게 평화와 정적을 제공했던 밝은 장소는 더 이상 주어진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됩니다. 그밖에 “문”의 개념은 보브롭스키의 시에서 대체로 새로운 (주로 추악한) 세계로 향하는 입구로, “창문”은 부자유스러운 공간으로부터의 출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보브롭스키는 대표적 시, 「방랑자 Wanderer」의 제 3연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모든 문은 열려 있다 (...)/ 말해 봐, 숲이 소리 내고/ 물고기는 심호흡하는 강물위로 헐떡이며, 하늘은/ 불빛으로 떨고 있음을.” 이 시에서 방랑자는 군인입니다. 그러니까 정복자로서 낯선 땅을 디디게 된 방랑자를 맞이하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문이며, 그 속에는 자연의 두려움과 고통이 내밀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때 그 노파는 냄새나는

그미의 방에서 노래했지. 램프는

윙윙 소리 내고.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서며, 어깨 너머로

개들을 부르고 있었지.

(Da sang die Alte in ihrer

duftenden Kammer. Die Lampe

summte. Es traten die Männer

herein, sie riefen den Hunden

über die Schulter zu.)

 

이 연은 「유년」의 주제를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 모릅니다. “그 노파”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시인은 틀림없이 어느 특정한 사건에 관한 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파는 어떠한 이유에서 냄새나는 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요? 무릇 밀폐된 공간에서 냄새가 나는 법이 아닌가요? 어쩌면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은폐시키려고 본의 아니게 칩거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램프가 윙윙거”린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그 노파는 어딘가 은신한 채 기름 램프 혹은 카바이트 램프를 켜두고 지냈을 테지요. 이때의 상황은 시기적으로 제 2연의 상황과는 다른 게 분명합니다. 제 2연에서 유대인 남자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장사할 수 있었던 반면, 제 7연에서 노파는 어느 지하실, 혹은 다락방에서 은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1941년 혹은 1943년의 전쟁 시기일 수도 있고, 개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던, 전쟁 전 내지는 평화로운 세계가 폭력적 세계로 뒤바뀌는 기간일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명확하게 말하지 않느냐고요? 보브롭스키의 시 문학 작품은 대체로 특정한 사실 혹은 사건을 암시하거나 상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제 3행 (독일어 원문)에서 시인은 문법적 주어, “es”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하나의 특정한 사건 대신에,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보편적 재앙으로서의 폭력 행위를 비판하게 합니다. 따라서 “남자들”은 어쩌면 SS 첩보원 혹은 군인일 수 있습니다. 혹은 그들은 어릴 적 시인과 말 타고 놀던 아이들일 수도 있으며, 왕년에 은 딸랑이를 들고 다니던 히틀러 청년 단원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깨 너머로” 셰퍼드 개들을 부른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 노파는 즉석에서 개에게 물려 죽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녀는 어디론가 끌려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탈선된, 쓰라린 시간의

밤은 침묵 속에 오래 뻗어나

詩句에서 詩句로 머문

유년 시절 -

그때 나는 꾀꼬리를 사랑했지.

(Nacht, lang verzweigt im Schweigen -

Zeit, entgleitender, bitterer

von Vers zu Vers während:

Kindheit -

Da hab ich den Pirol geliebt-)

 

무릇 유년에 대한 기억은 얼핏 보기에는 그리운 순수성으로 착색되어 있으나, 자세히 고찰할 때 그 속에는 미처 파악되지 않은 삶의 고통이라든가 죄악과 폭력에 대한 기억이 은밀하게 혼재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시인에게는 산울타리, 덤불 등은 마치 가시처럼 뻗어나가고, 개들을 부르던 남자들의 목소리는 말하자면 기억 속의 상처로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유년의 삶은 전쟁과 폭력의 상흔과 뒤섞인 채 기억의 저편에서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전쟁과 폭력의 시대는 시인의 뇌리에 “유태인”과 “검은 그림자”, “어둠”, “깊은 곳”, “산울타리”, “밤”, “침묵” 그리고 “두려움”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시인에게 남은 것은 그러한 기억 속의 상처를 시구와 시구 사이에 담는 일이었지요.

 

원래 인간 동물은 나쁘고 참혹한 기억을 가급적이면 망각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브롭스키는 그럼에도 자신의 기억을 시적 언어 속에 보존하려고 애썼습니다. 지나간 히틀러의 대학살 정책으로 인해 목숨 잃은 수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둘 때 독일 시인으로서 사죄한다는 게 얼마나 부끄럽고도 허망한 일일까요?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땅 치고 통곡한다 하더라도 과연 유령들이 되살아날 수 있을까요? 보브롭스키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최소한 한가지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민족의 잘못을 기억하며, 이를 글로써 남기는 작업이었습니다. 기억의 이러한 보존 행위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반성을 촉구할 뿐 아니라, 나아가 전체주의적 폭력이 횡행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앞장서야 할 마지막 저항 행위가 될 테니까요.

 

연구 논문 소게

강태호: 보브로프스키의 시에 나타난 나치 과거에 대한 자기 반성. 동시대 유대계 독일 여성 시인에 대한 초상시를 중심으로, , in: 독어교육, 90권 2024, 131 - 154.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