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설호: (4) 하이너 뮐러의 '보이체크의 상처'
(앞에서 계속됩니다.)
4. 텍스트의 제 2부
“극장에 의해 수없이 수난을 당한 텍스트. 운명의 여신에 의해
태어날 때에 눈꺼풀이 뜯겨나간 23세의 젊은이가 창출해낸 작
품.”
이미 언급했듯이 「보이체크」는 게오르크 뷔히너의 미완성 유작으로서, 다른 두 편의 극작품, 「당통의 죽음」 그리고 「레옹세와 레나」와 함께 20세기에 들어 활발하게 공연되었다. (각주: 출판인 카를 에밀 프란쪼스에 의해 1878년에야 비로소 간행되었고, 1913년에 뮌헨의 레지덴츠 극장에서 비로소 초연되었다. 林宗大: 뷔히너 출판자 카를 에밀 프란쪼스, in: 金光圭 편, 현대 독문학의 이해, 민음사 1983, 61 - 83쪽 참고.). 그러나 과연 「보이체크」의 진의 (眞意)가 제대로 수용되었던가? 하고 뮐러는 반문하고 있다. 대체로 극작품들은 특히 서구 사회에서 연출자에 의해서 혁명의 가시가 뜯겨나간 채 작위적으로 공연되지 않았던가? (각주: 구서독에 비하면 구동독에서는 연출가가 그다지 막강한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구동독의 연출가들의 목을 조르는 것은 국가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구서독의 연출가들은 극작가의 텍스트를 너무나 작위적으로 해석하고, 남용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뮐러: “연극은 -만약 청중을 망각할 경우 한해서 만이- 현실에 대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배우가 청중을 해방시키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청중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Ich Wer ist das Im Regen aus Vogelkot im KALKFELL, Frank Hörnigk (hrsg.), Berlin 1996, S. 125.). 그렇다면 운명의 세 여신 가운데 탄생을 관장하는 여신이 23세의 젊은이, 게오르크 뷔히너가 태어날 때 눈꺼풀을 뜯어내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뮐러의 표현에 의하면 운명의 여신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감히 간파하지 못할 참다운 사실을 오로지 한사람만이 직시할 수 있도록 조처한 게 틀림없다.
“열병으로부터 마침내 철자법으로 튕겨나가, 마치 납을 녹일 때
형성된 것 같은 하나의 구조.”
“열병”이란 작가가 작품을 잉태시킬 때 느끼는 아픔을 관련되는 표현이다. 작가의 끓어오르는 창작욕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조금도 여과되지 않고 글자로 이전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뷔히너가 처음부터 머리와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사상과 감정은 그대로 작품에 용해되어, 마치 주조물 (鑄造物)처럼 오늘날 남아 있다.
“만약에 미래를 향해 응시하기 전에 숟가락을 든 손이 부르르 떨
리면, ‘그’의 손은 잠들지 못한 천사로서 천국으로 향하는 입구
를 차단시키고 있다.”
여기서 뷔히너의 작품 「보이체크」는 마치 어떤 굶주리고 외면당하는 현대인의 흉상으로 비유된다. 보이체크의 비참한 삶에서 암시되는 제반 사회적 문제는 아직도 미결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그’의 손은 부르르 떨릴 뿐이다. 보이체크와 같은 사람을 창출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뮐러의 견해에 의하면 그의 불행에 대해 책임이 있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사회적 제반 난문제들 가운데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고 삶을 마감하는 자는 천국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체크를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그곳이 극작품 집필이라는 죄없는 행위의 본령이
아니던가?”
‘그곳’은 바로 천국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작가의 창작 동기는 -개별 작가들과 주어진 시대에 의해 편차가 있겠지만- 광의적 의미에서 유토피아의 사고에서 파생된다. 이는 지상을 천국과 같은 곳으로 변모시키려는 예술적 노력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작가들은 불행한 삶을 면치 못한다. 뷔히너처럼 사회의 핵심 문제 내지는 타부를 건드릴수록 작가는 핍박당하거나, 동시대인들의 통념적 사고에 의해 비웃음을 당할 뿐이다. (각주: 예컨대 뮐러는 프로이센 권력, 가톨릭 신앙, 전통적 관습에 항의하던 작가 오스카 파니차 (1853 - 1921)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스카 파니차는 독일 통일의 희생자였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통합은 배척이었다. 파니차는 배척당한 자에 속했으며, 한마디로 둥지를 더럽히는 인간, 신을 우롱하는 자 그리고 반쯤 미친 이단자의 반문화적인 전통 속에 존재하는 국가의 적이었다.” (고딕 - 필자). H. Müller: Panizza oder die Einheit Deutschlands, in: O. Panizza, Dialoge im Geiste Huttens, München 1979, S. 9.). 그렇지 않을 경우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잘못 이해한다. 그밖에 인용문은 문학의 상품화 현상, 수용 미학에 대한 과대평가에 의해 작가보다는 독자 (비평가)를 맹목적으로 선호하는 현상,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비평가들의 횡포 등과 비교될 수 있겠다.
“피임약 복용으로 인해 현저히 감소된 오늘날 연극은 얼마나 무
해한가?”
“피임약 복용으로 현저히 감소된”이라는 부분은 텍스트의 원문에는 하나의 단어, “Pillenknick”으로 표현되고 있다. 60년대 말엽 독일에는 결혼한 (혹은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피임약을 복용하여, 유아 출생률이 현저히 줄어든 바 있다. 그렇다면 혁명의 유산을 낙태시킨 연극은 어째서 오늘날 해롭지 않는가? 하이너 뮐러의 발언에 의하면 구동독에서는 극작가들이 당 문화 관료와 마찰을 빚게 되므로, 작품 발표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각주: 아닌 게 아니라 극작품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모순이나 문제점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첨예하게 드러내기에 합당한 장르이다.). 이에 비하면 구서독에서는 매스컴과 문학의 상품화 현상으로 극작품은 독자나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연극인들에 의해 마구 남용되기 일쑤이다.
“어떤 다른 시대의 빠른 속력으로 다가오는 뇌우가 퍼붓기 이전
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하이너 뮐러는 80년대 중엽의 거대한 변화를 목전에 둔 유럽 사회를 인용문처럼 표현하고 있다. 85년의 고르바초프의 등극 및 데탕트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라. 뮐러는 1985년에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지녀야 합니다. 즉 어떤 사회주의 사회 및 동독의 역사적 상황속의 국가는 어떤 전초병을 필요로 한다는 목표 말입니다. 전초병은 반드시 고유의 능력을 부여받아야 하며, 그래야 우리는 유토피아의 에너지를 상실하지 않고도 비참한 처지를 극복해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의 과업이요, 문학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각주: Ulrich Dietzel, Gespräch mit Heiner Müller, in: Sinn und Form, 37 Jg. (1985), H. 6, S. 1193 - 1217, Hier S. 1217.).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뮐러의 「보이체크 상처」를 현재의 결과론적 시각이 아니라, 80년대 중엽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역사적 시각으로 고찰해야 한다.
“가방속의 렌츠, 리브란트에서 유래한 꺼져버린 번개불. 엘베 강
하류의 하벨의 얼음 아래로 가라앉은, 유토피아 없는 공간속에 머
무른 게오르크 하임의 시대.”
인용문에서는 두 명의 독일 작가가 등장한다. 야콥 라인홀트 미햐엘 렌츠 (1751 - 1792)와 게오르크 하임 (1887 - 1912)이 바로 그들이다. (각주: 리브란트에서 1751년에 태어난 렌츠는 1776년 바이마르로 가서 친구 괴테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으나, 그곳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1792년 5월에 모스크바의 길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게오르크 하임은 1887년 히르쉬부르크에서 출생하여, 법학을 공부하고 1911년 로스토크에서 법학 박사를 받게 된다. 게오르크 하임은 프로이센의 제국주의적 정치 풍토를 직시하지 못하고, 유미주의의 환상과 의고전주의에 가까운 시작품들을 발표한 바 있다.). 렌츠는 오만한 괴테의 질시와 냉담에 의해 바이마르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바이마르를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따뜻한 수프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식탁을 찾아 에어푸르트로 가려고 해. 친구들이여, 안녕!” (각주: Chr. Hein: Waldbruder Lenz, in: ders., Öffentlich arbeiten, Berlin u. Weimar 1987, S. 70 - 96, Hier S. 91.). 우리는 렌츠의 광증 및 방랑벽을 그의 내면적 문제로 국한시켜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면 작가의 궁핍한 삶, 주위의 무관심 그리고 대가들의 오만에서 나온 냉대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인용문에서 “번개 불”이란 앞에서 언급되는 “불꽃”의 이미지와는 달리, 정신 착란을 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렌츠의 사상적 촉수를 뜻한다. 렌츠에 비하면 하임은 정치 감각이 없는 유미주의의 이상주의 작가로서 1912년 하벨 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그만 얼음 속에 빠져 익사하였다.
“비투스 베링의 뇌가 뜯겨나간 해골속의 콘라트 바이어의 시대.”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베링과 바이어가 누구인지를 미리 알아야 할 것이다. 비투스 베링 (1680 - 1741)은 러시아의 해군 장교로서 북극을 탐험한 사람이다. 소위 베링 해협도 그의 이름에 의해 명명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작가 콘라트 바이어 (1932 - 1964)는 1970년에 비투스 베링의 머리라는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데 (각주: 콘라드 바이어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에 째즈 연주가, 화랑을 경영하였다. 1952년 아르트만과 함께 「비인 그룹」을 결성하여, 구체시, 극작품과 산문 작품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고유한 표현 방법을 추구하고 독설, 몽타쥬 기법으로 실험 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Siehe Konrad Bayer: Der Kopf des Vitus Bering, Frankfurt a. M. 1970.), 뮐러는 이 점을 특히 고려한 것 같아 보인다. 비투스 베링에 관한 문헌을 바탕으로 러시아 출신의 북극 연구가를 추적한다. 말년에 베링은 간질병에 몹시 시달렸다. 그러나 바이어의 작품에 주인공으로 행동하고 성찰하는 베링은 ‘성스러운 병 morbus sacer’을 앓는 사람으로 부각된다. 전설에 의하면 성스러운 병을 앓는 자는 과거와 미래로 향해 여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것을 좌우 궤도의 한점에 맞출 수 있다고 한다. 이로써 성스러운 병자는 극한 상황의 경험 속에서 인간의 운명을 시사해 준다는 것이다.
바이어는 성스러운 병에 걸린 베링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작가는 마치 “베링의 뜯겨나간 해골”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복합적 관점으로써 역사적 현재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그가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끝없이 우연히 출현하는 상황,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감각이 꽁꽁 얼어붙은 상황속의 고립된 섬들, 빙하기의 얼음 그리고 아무런 관련성을 시사하지 않는 역사적 현재의 편린들. 작가는 절망의 늪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각주: 언급된 다른 작가와 마찬가지로 콘라트 바이어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1964년에 장편 소설을 집필하려고 하겐부르크라는 폐허의 성에서 머물다가, 그해 10월 10일에 가스를 틀어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셰익스피어 술집 앞에서 우측 통행로에 있던 롤프 디터 브링크
만.”
하이너 뮐러는 콘라트 바이어에 이어 68년도 학생 운동의 기수이자, 반체제 전위주의 시인 롤프 디터 브링크만 (1940 - 1975)을 언급하고 있다. (각주: 롤프 디터 브링크만은 60년대 초에 쾰른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다 자유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누보로망의 영향으로 브링크만은 일상의 권태, 팝송, 코믹, 영화의 포르노 장면 그리고 광고 등을 시작품속에 형상화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그의 죽음이다. 1975년 5월 3일 브링크만은 캠브리지 대학의 시 축제에 참석하려고 영국에 갔는데, 런던의 어느 도로를 건너다가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각주: Siehe Sibylle Späth: Rolf Dieter Brinkmann, Stuttgart 1989, S. 117;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런던의 차량은 생각을 달리하는 전위주의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권태로운 시민 사회에 항거하는 마지막 표현인지 모른다.” ). 아마도 브링크만의 작품에서 인용된 것 같은 “셰익스피어 술집 SHAKESPEARE PUB”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 상징적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아무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오늘날 그저 술집 이름으로 사용되듯이, 브링크만과 같은 현대시인 역시 소위 전도된 질서 (영국의 우측통행 차량)에 의해 세상을 떠나는 일상인에 불과할 뿐이다. 렌츠, 하임, 바이어 그리고 브링크만 등과 같은 작가들은 제각기 주어진 시대와 그들의 문학적 특성들은 다르나, 불행한 최후라는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전사 (前史)의 야만적 현실 앞에서 드러나는 포스트 역
사 (POSTHISTOIRE)에 관한 거짓은 얼마나 파렴치한가?”
“반복된 야만의 역사”를 고려하라. (각주: 전사 (前史)란 “사회주의 이전의 사회 구도 전체에 대한 비유”이다. (정민영: 하이너 뮐러의 희곡에 나타난 역사관과 극작 기법, Diss., 1996, 98 - 101쪽.) 허나 여기서는 구동독의 사회 구도 또한 전사에 포함된다. 왜냐면 “사회주의 사회 구도의 역사적 일탈”, “야만의 사회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의 봉합”이 거론되기 때문이다.). 왜 뮐러는 “포스트 역사”를 프랑스어로 표기했을까? 이는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뮐러의 신랄한 비판과 직결된다. 무릇 프로이센 사람들이 “주어진 상황은 무척 심각하나, 희망이 없지는 않다”라고 생각하는 반면,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은 아무런 희망이 없으나, 우리는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각주: Siehe Wolfgang Emmerich: Gleichzeitigkeit. Vormoderne, Moderne und Postmoderne in der Literatur der DDR, in: ders., Die andere deutsche Literatur, Opladen 1994, S. 134.).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 혹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기존했던 사회주의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전통마저 근본적으로 부정함으로써, 그들의 두 가지 입장을 관철하려고 한다. 그 하나는 가능성의 개념을 은폐시키고 현재의 현실만을 미화 (美化)시키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과거와 현재의 자본주의적 야만을 은폐시키고 미래를 다만 허상으로서 추화 (醜化)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두 가지가 파렴치한 거짓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계급 문제를 은폐하고 ‘현재 상태 status quo’에 안주하려는 강자의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뮐러는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이러한 수수방관적 냉소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한다. 뮐러의 표현에 의하면 현재의 세상에는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수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그러한 절망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한다고 한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