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박: (4) 블로흐의 카테고리 이론
(앞에서 계속됩니다.)
18. 시간의 카테고리: 블로흐는 현존재의 형태가 경험주의의 방식으로 채택되는 게 아니라, 어떤 역사적 과정에서 변화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즉 시간은 시계에 정밀하게 드러나는 시각의 의미로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의 개념은 메트로놈에 의해서 똑같이 이어지는 시각의 연속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교환 가치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양적으로 표기되는 가격의 순서에 의해서 질적으로 서로 다른 모든 것을 그야말로 평탄하게 만들 뿐이다.” (Bloch, EM: 63).
자연과학자들은 시간을 하나의 “기나긴 관(管)”으로 비유합니다. 역사는 이러한 관을 통해서 움직이는 과정인데, 하나의 사건이 지나가면 다른 사건이 다시 스쳐 지나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역사를 비-동시적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과 같습니다. 시간은 블로흐에 의하면 “변화의 어떤 추상적인, 딱딱한 틀”이 아니라, “구체적 과정으로서의 유연한 들판”이라고 합니다. 시간은 그 자체 변화의 내용 그리고 변모의 방식을 스스로 바꾸어나간다고 합니다.
19. 장소의 카테고리: 장소 또한 마치 “트렁크와 같은” 거대한 저장 용기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간이란 마치 금붕어가 수족관에서 유유자적하게 헤엄치듯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장소는 하나의 경직된 틀을 뛰어넘는 카테고리입니다. (Bloch, MA: 304). 블로흐가 말하는 공간이란 리만 기하학이 제타 함수로 추적하는 곳을 가리킵니다. 리만의 4차원의 기하학은 아인슈타인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연체동물처럼 느슨하고 유연한” 특징을 지닙니다. (Bedekind: 376). 존재는 마치 블랙홀과 같은 공간에서 서서히 형성된다고 합니다.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리만의 공간 개념은 4차원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보편적 상대성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공간은 하나의 미터법에 근거하는 경직성을 드러내지 않으며, 아인슈타인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연체동물 Mollusca“처럼 유연성을 드러내고 있다. 공간은 물질의 다양한 변화에 대응하여 이리저리 휘어지며, 특히 중력에 의해 형태가 결정된다. 중력은 물질의 덩어리에 하나의 공간이라는 기하학적 관계를 규정해주며, 하나의 영역이 유연하게 유동할 수 있도록 물질에 자극을 가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유클리드 기하학을 동원하여 직관적으로 접한 바 있는 공간이라는 특징은 사라지게 된다. 말하자면 종래의 삼차원으로 파악되던 장소의 개념은 바로 여기서 파괴되고 만다. 이러한 공간 유형은 어떤 운율을 가변적으로 이어나간다. 바꾸어 말하자면 윤율의 장(場)은 영원히 최종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물질의 인과 법칙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물질과 함께 변화를 거듭한다.” (Bloch, EM: 110).
20. 인과론의 카테고리: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카테고리에 관해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객관화와 방향성을 내세우는 인과론 그리고 목적론에 관한 카테고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앞의 인용문 가운데 마지막 문장에 기술되어 있는 인과율입니다. 인과율은 고전적인 논리학에서 언급된 바 있지만, 하나의 개방된 시스템에서는 더 이상 활용될 수 없습니다. 블로흐는 인과율에 대하여 어떤 경우에도 하나의 완강한 원인이 나중에 필연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블로흐는 다양한 맥락에서 경향성을 언급하지만, 이러한 경향성은 다양하고 개방적인 특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블로흐의 경우 하나의 명징한 결과를 초래하는 확고한 원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하면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는 경제적 원인이 나중에 필연적으로 역사적 흐름 속에 필연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어의 『유토피아』는 봉건 경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카우츠키: 31), 토마스 뮌처의 저항은 오로지 종교 개혁의 측면에서만 이해될 뿐, 사회주의의 동력을 직접 활용될 수 없다고 합니다. 블로흐는 카우츠키의 역사적 결정론에 입각한 철두철미한 인과율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21. 역사적 결정의 목적론에는 하자가 도사리고 있다. 역사적 흐름이 법칙에 합당하게 진행된다는 가설은 원인 속이 이미 결과가 자리하고 있으며, 원인은 필연적으로 결과로 이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의 운동은 카우츠키의 입장에 의하면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의 실현으로 귀결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미래 사회에 혁신적 사항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제반 조건들이 사전에 충분히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들이란 필연적 결과로 이어지는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의 결과가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지만, 처음의 원인이 필연적으로 나중의 결과를 밝혀낸다고 분명하게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블로흐의 견해에 의하면 새로운 무엇은 미래에 도출될 수 있지만, 수미일관 하나의 필연적 결과로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과정은 미래 사람들에게 선한 무엇을 선사할 수 있지만, 하나의 결실을 안겨주지 않을 수도 있지요. 모든 것은 무(無)와는 달리 가능성이라는 의미 속에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능성 속에는 나중에 얼마든지 번복될 수 있는 확장된 결과가 도사리고 있으며,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부분적인 조건들이 공중에 부유하고 있습니다. (Bloch, EM: 143).
22. 상호 작용과 모순의 인과론: 물론 원인으로서의 조건 그리고 결과 사이에는 얼마든지 인과론적인 결합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관관계는 전통적 의미의 인과율에 의해서 해명될 수는 없습니다. 종래의 인과론은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어떤 일방적이고 일방통행의 관계를 설명할 뿐, 원인과 결과 사이의 상호 영향과 움직임을 모조리 전해주지는 못합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과론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 내립니다.
“변증법은 처음부터 토대와 함께 오성으로서 기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강렬한 외연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설령 질서 잡혀 있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자동적인 무엇으로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화의 능력 그리고 수많은 전복 행위를 계속해 나간다. 이로써 변증법은 어떤 ‘선험적으로 a priori’ 분석된 인과론을 ‘후 체험적으로 a posteori’ 그리고 총체적인 방식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변증법은 인과론을 발전 가능성이라는 가치에 근거하여 받아들인다. 이로써 나타나는 특징은 원인과 결과의 상호 작용이고, 모순의 인과론이다. 그렇기에 변증법은 ‘원래 사실Ur-Sache’로서의 원인을 유토피아의 방식으로 이어 나가는 행위자 내지는 동인의 행위로 작용한다.” (Bloch, EM: 132).
23. 객관에 합당한 무엇의 형체: 다섯 번째 카테고리로 외부로 향해 자신의 면모를 출현시키는 형체를 가리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카테고리는 블로흐에 의하면 세계의 과정과의 관련 속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카테고리는 그 자체 세계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외부로 빠져나오는 존재에 관한 진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카테고리가 어떻게 세계의 변화 과정에서 객관에 합당한 자신의 형체를 출현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반 카테고리는 이러한 현실적 관련성을 통해서 객관적 유형의 모델이 어떻게 제대로 형성되는지를 분명하게 밝혀낸다. 바꾸어 말하자면 현존재의 형태가 어떻게 구체적 면모로 드러나는가를 세심하게 고찰하고, 이를 사전에 예리하게 포착해 내며 나아가 그것을 앞으로 향해 연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것들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카테고리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객관에 합당한 무엇의 형체를 분석하고 구명하면서 결국 그것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고, 자신의 객관적인 면모를 연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카테고리의 형체는 결코 특정 시대에 와해되거나, 제한당하지 않은 채 스스로 변모해 나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확장되는 게 바로 과정의 세계라는 현존재의 형태가 아닐 수 없다. 이로써 카테고리가 어떤 멈추어 있는 형체로 잘못 이해되는 경우를 사전에 가로막게 된다. 다시 말해서 카테고리가 스스로 어떤 내용을 고수하면서 무언가를 발설하게 되면, 그것들은 그럴수록 더욱더 변증법적으로 고유한 확장 형체로서의 고유한 면모를 발설하게 될 것이다.” (Bloch, EM: 161).
24. 과정의 카테고리와 측정 방식: 새롭게 산출된 것은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어떤 측정 기준에 의해서 명징하게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새롭게 만들어진 모든 것은 생산된 무엇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측정하고 수적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요? 새롭게 출현한 모든 무엇은 이미 존재했던 것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기존하던 무엇과 양적 측면에서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제반 카테고리가 정지해 있는 형체가 아니므로, 새롭게 외부로 출현한 무엇 역시 기존했던 무엇과 양적 측면에서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모든 측정이 물리학적 측량의 의미에서 가능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질적으로 똑같은 무엇만을 서로 비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질적으로 변화된 변모 그리고 내용의 유형으로 완전히 변형된 무엇은 단순히 유클리드 기하학의 관점으로 측정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정의 카테고리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측정 방식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사실에 근접하는 측정 방식이 아니라, 척도 자체가 주어진 사실의 내부에서 유래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척도는 명징한 사항이 아니라, 양적으로 고찰할 때 다소 흐릿하고 불명료한 사항만을 측량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양적으로 흐릿하고 불명료한 사항은 측정 과정에서 결국에는 질적으로 흐릿하고 불분명한 사항으로 귀결하게 될 것입니다. 그밖에 이러한 유형의 측량 방식은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실 그리고 다른 경우에 적용될 수가 없으며, 그 자체 유일한 방식으로 측정을 종결짓게 될 것입니다.
25. 형체는 변증법적으로 변화를 거듭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당파성이다. 이것은 세계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변화하게 하고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설정하기 위해서 깊이 숙고한 다음에 태동한 사고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당파성은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 그리고 이와 관련되는 모든 객관적 경향성을 촉진하고 이행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힘을 쏟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여기서 중시해야 할 사항은 결코 어떤 단순히 주어진 사실에 방향을 설정하는 척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단순히 주어진 사실에 대항하는 기준이 역으로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저항적 자세를 지닌 척도가 세계 역사의 변화 과정에서의 물화, 즉 하나의 구체적 사실로 고착될 경우, 우리는 과감하게 이러한 기준이 전적으로 파기하고 스스로 사라지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기준은 반드시 세계의 바람직한 변화를 추동하는 객관적 현실적 경향성과 조화로움을 발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의 척도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현재 비-사실로 주어진 것 가운데 패배하지 않은 어떤 부분을 찾아내어 긍정적인 차원에서 활용해나가야 한다. (...) 바로 이러한 까닭에 형체와 관련되는 모든 카테고리는 내적인 무엇을 계시하는 것이어야 하며, 나아가 스스로의 내부에서 자신을 확장시키는, 이른바 ‘내부 확장의 형체Auszugsgestalt’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변화에서 돌출하는 새로운 무엇의 척도이며, 모든 카테고리는 이러한 척도에 따라 변화무쌍한 방향의 과정에서 변증법적으로 변모를 거듭하게 된다.” (Bloch, EM: 154f.).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