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369) 성 단상 (8)

필자 (匹子) 2017. 6. 24. 11:14

YJ에게 

72: 오디세우스는 꿈에 그리던 아내 페넬로페를 만나기 위해서 17년 동안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애틋한 마음으로 페넬로페를 만나려고 오랜 시간 애타게 갈구했다는 사실이지, 그미와의 재회 자체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임과의 재회는 감정의 크기에 있어서 임에 대한 갈망보다 미약하기 때문이다.

 

73: 두 연인이 오랫동안 오순도순 관계를 지속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좋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러한 반응 속에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은밀한 갈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누군들 자신에 맞는 임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완전히 영원한 사랑은 자크 라캉도 말한 바 있지만 하나의 환상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끝없이 갈구한다. 어쩌면 영원히 완전한 사랑을 꿈꿀 게 아니라, 최소한의 필수적인 사랑의 요건을 상실하지 않도록 행동하며 사는 게 오히려 현실적인 태도인지 모른다. 통일을 애타게 갈구하는 나라는 분단 상태에 처해 있는 반면에,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고 서로 돕는 나라는 빨리 통일을 실현하곤 한다.

 

74: 문제는 일부일처제도가 좋은가, 나쁜가? 하는 추상적 도덕에 관한 물음이 아니다. 일부일처제 하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며 사랑할 수 없는 불행한 영혼들을 달리 도울 방법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더 중요하다. 일부일처제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의 경우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으로 탁상공론으로 끝나는 이유는 주어진 정황 그리고 개개인의 이질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75: 성의 억압은 호모 아만스의 생명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으로 인간 동물을 병들게 하고, 사회적으로는 사도마조히즘의 인간형을 양산시킨다. 

 

76: 남녀에게 혼전 순결을 강요하는 것은 강제적 성윤리에서 비롯한 억압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이를 지키려는 젊은이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77: 여성 비하의 시각은 현모양처의 이상 속에도 은밀하게 숨어 있다. 어느 여인인들 자식 앞에서 현명하게 처신하고, 남편에게 어질게 행동하고 싶지 않겠는가? 문제는 현모양처의 미덕 속에 처음부터 한 개의 삶의 패턴만이 올바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데 있다. 즉 여성은 반드시 결혼해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남편을 받들고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현모양처 속에는 한 여성이 노예로 타인의 도구로 살아가야 한다는 요구사항이 숨어 있다. 남편과 자식도 엄밀히 말하면 타인이다. 한 인간이 어찌 평생 이타적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78: 결혼의 의미는 20세기 초의 서구 가부장적 시민 사회에서는 부부의 합법적인 성생활을 인정받기 위한 관문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혼전 동거가 활성화된 21세기 초의 서구 사회에서 결혼이란 부분적으로 자식 출산 및 육아를 위한 형식적 절차로 간주되고 있다.

 

79: 사랑의 결정권은 동물 세계에서는 주로 암컷에게 있다. 가부장적 시민 사회에서 사랑과 성을 자의로 선택하는 자는 겉보기에는 남성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체로 여성들일 경우가 많다. 남자는 자신의 결혼 조건을 내세우며 그저 구애할 수 있을 뿐이다. 여성에게는 예외적 사항이지만- 최소한 거절할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80: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가부장적 가족 구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부장적 가족 구도야 말로 경제학적으로 그리고 성-경제학적으로 가장 편리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리하다고 해서 유효하다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먼 훗날에 이르면 가족과는 다른 공동체가 출현하여, 미래 인간의 사랑의 삶은 훨씬 다원화될 것이다.